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안석 (문단 편집) == 그 외 == [[송신종|신종]]이 왕안석에게 "옛날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는데 왜 못 이겼냐?"라고 묻자 "[[연개소문]]이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참고로 이 일화는 중국 측의 사료에서는 따로 전하지 않는데, 술이부작의 원칙[* 지어내어 기록하지 않기. 실제로 김부식은 안시성주의 활약을 기록했지만 그의 이름은 기술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김부식 본인도 "이런 영웅의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게 애석하다" 라는 개인적 견해만 남겼을 뿐이다.(흔히들 알고 있는 양만춘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처음 등장한지라 신뢰하기 힘들다.)]을 중요시했던 김부식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에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은 낮다.[* 더군다나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니 더더욱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연개소문을 띄워줄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 아마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들은 이야기를 실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변법개혁을 이끈 개혁정치가의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의 뛰어난 산문작가들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 [[소순]](蘇洵) · [[소식(시인)|소식]](蘇軾) · [[소철(시인)|소철]](蘇轍)[* 소순은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다. 그래서 이들은 3소(三蘇)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증공]](曾鞏)에 왕안석을 일컫는다. 이 칭호는 송나라 때의 진서산이란 사람이 처음 주창한 단어로 이 평가가 그대로 이후까지 이어져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진 것. 이런 의미에서는 중국문학사에도 제법 비중이 큰 인물이다. 특히 소식(소동파)과는 정치판에서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소식 개인적으로는 왕안석을 높이 평가했었고, 소식이 왕안석의 변법 중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마광의 눈밖에 나서 좌천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식은 실각하여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왕안석을 찾아가 함께 지내며 시나 문장을 짓기도 했었다고 한다. 반면 소식의 동생 소철은 신법에 명확히 반대하는 노선을 따랐고 이에 신법 찬성파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조선 [[정조(조선)|정조]]의 경우는 세손시절에는 위에 나왔던 것처럼 왕안석을 비판했지만 왕이 되어서는 왕안석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 희령(熙寧)의 정치가 물론 폐단은 많았지만 병제(兵制)를 변통한 것과 같은 것은 실로 좋은 법인데 어찌 모두 폐지해서 결국 융정(戎政)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약해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왕안석에서 나온 것이라면 꼭 서둘러 폐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쳤는가. 정자(程子)가 ‘우리들이 그를 격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말이 진실로 대현인의 공평한 말씀이며 공평한 마음이다. 대체로 왕안석은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등용한 것은 그 뜻으로 보면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실록]] 정조 15년(1791) 4월 30일의 기사 중[[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04030_002|#]]" > "‘왕안석은 반드시 영행전(佞幸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혹자는 ‘마땅히 명신전(名臣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명신록(名臣録)》을 보니 과연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송사》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주자(朱子)도 이미 명신으로 인정했으니, 어찌 얻기 어려운 인재가 아니겠는가. 다만 여혜경(呂惠卿) 같은 무리들을 등용해 진출시킨 것이 큰 착오였던 것이다. 대체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 역시 운수가 좋고 나쁜 것에 관계되는 것이다. 군주는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의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역시 정조 15년(1791년) 4월 30일의 기사 중" 정조는 자신이 총애했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에게 '너는 왕안석'이라고 말한적도 있다. 박제가가 이루기 어려운 개혁을 주장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근대 중국 지식인([[사대부]])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고 도리어 이단아라고 보는 시각까지 존재했으나 청말 [[캉유웨이]]가 왕안석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왕안석에 대한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정적인 사마광과 사적으로는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로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로 여기고 존경했으며, 사마광은 왕안석에게 상술된 것처럼 여혜경은 믿을 만한 인사가 못 되니 경계하라는 정치적 조언까지도 해 줬다. 두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신법당과 구법당 사이에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두 사람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흙탕 싸움이 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