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심기 (문단 편집) === 후주 시기 === 왕심기의 조상은 요서(遼西) 출신으로 뒤에 낙양(洛陽)으로 옮겨 살았다. 왕심기는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건우(乾祐) 연간 초에 [[곽위]]의 막하에 소속되었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신중하여 곽위가 매우 신임하였다. 곽위가 이수정(李守貞)을 평정할 때 종군하고 공적을 세워 청직좌번부장(廳直左番副將)으로 서임되었다. 곽위는 후한 조정을 전복시키고 951년 [[후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였다. 후주가 들어선 뒤, 왕심기는 동서반행수(東西班行首)·내전직도지(內殿直都知)·철기지휘사(鐵騎指揮使)를 역임하고 [[시영]]에게 종군하여 [[유민(북한)|유민]]을 정벌할 때 적을 세워 동서반도우후(東西班都虞候)로 옮겼고 철기도우후(鐵騎都虞候)로 전임되었으며, 우제2군도교(右第二軍都校)로 전임되었다. 시영이 금군의 장수들을 불러 후원에서 활을 쏘게 했는데, 왕심기가 연달아 과녁에 명중하자 시영은 왕심기를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이윽고 왕심기는 근주자사(勤州刺史)를 겸임하였다. 시영은 954년 곽위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세종이다. 세종이 [[남당]]을 친정할 때 서주(舒州)의 방비가 견고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조서를 내려 곽영도(郭令圖)에게 자사를 겸임하게 하고 왕심기와 사초에게 정예 기병을 이끌게 했으며, 서주성을 공격하여 하룻밤 사이에 함락시키고 자사를 사로잡았으며, 수십만에 달하는 남당의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곽영도가 이윽고 입성하자, 왕심기 등은 마침내 황주(黃州)를 구원했다. 며칠이 지나 곽영도가 서주에서 쫓겨나자, 왕심기는 경기병을 선발하고 밤에 조용히 출발하여 이틀 밤을 머무르다가 서주성 아래에 이르러 서주를 함락시켜 곽영도는 다시 치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세종은 왕심기의 공적을 칭찬하여 산원도지휘사(散員都指揮使)로 제수하였다. 다시 자금산(紫金山)에서 남당(南唐)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선봉에 서다가 화살에 맞았으며, 공학우상도교(控鶴右廂都校) 겸 건주단련사(虔州團練使)로 전임되었다. 세종이 호주(濠州)를 포위할 때 왕심기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 수천 명을 이끌어 수채(水砦)를 함락시키고 월성(月城)을 탈취하여 호주성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초주(楚州)를 공격할 때 남면순검(南面巡檢)으로 임명되었고 초주성이 함락되기 직전 왕심기는 초주성에 주둔한 남당의 군대가 반드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복병을 배치하여 남당의 군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뒤이어 왕심기의 예측대로 성내의 병사들이 초주성 남문을 열고 달아나자, 왕심기의 복병이 이를 공격하여 수천 명을 참수하고 5천여 명을 붙잡아 세종에게 바쳤으며, 명마, 옥대, 수백 필의 비단을 하사받았다. 회남이 평정되자, 철기우상도교(改鐵騎右廂都校)로 전임되었다. 와교관(瓦橋關)을 평정할 때도 종군하였다. 시영이 죽고 시영의 4남인 [[시종훈]]이 즉위하니, 이가 마지막 황제인 공제였다. 왕심기는 전전도우후(殿前都虞候) 겸 목주방어사(睦州防禦使)로 옮겼다. 1년 뒤인 960년, [[진교의 변]]을 통해 조광윤이 신하들로부터 추대되고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북송을 건국하고 황제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