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순식 (문단 편집) == 생애 == 명주(溟州)의 성주로서 현 [[강원도]] [[속초시]]에서 [[삼척시]]에 이르는 [[영동#s-1|태백산맥 동쪽]]의[* 본래의 영동은 [[울진군]], [[평해]]까지를 이르고 김주원의 후예라고 가정할 때 왕순식 가문의 봉토도 울진, 평해를 아우르지만 이 때 당시에는 울진, 평해의 호족들은 왕순식과는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던 것 같다.] 광대한 봉토를 거느리고 있었던 당대의 대호족. 전대 성주 [[허월]]이 불가에 귀의함에 따라 일찍부터 성주로 활동하였고, 마침 신라 말의 혼란기에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장군을 자칭하며 거의 독립된 나라의 왕이나 다름 없는 세력을 구축하였던 당대의 이름 있는 호족이었다. 아직 [[양길]] 휘하의 군사령관이던 [[궁예]]가 명주를 치러 왔을 때, 훨씬 우세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궁예는 명주를 통째로 정복하고도 성주직과 재산과 봉토 등 원래 순식이 갖고 있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순식 또한 이에 감복하여 양길이 아닌 궁예에게 충성을 바치며 궁예가 양길로부터 독립하는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궁예가 [[태봉]]을 건국한 이후로도 가장 믿음직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활동했다. [[태조(고려)|왕건]]이 918년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제거한 다음 왕위에 오르고 [[고려]]를 건국하자 이에 대노하여 패역한 찬탈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왕건을 치려 하였다. 순식 개인이 갖고 있던 세력이 워낙에 강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반항해도 패서호족들의 수장인 왕건조차 당장 손을 댈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922년 7월에 왕건이 보낸 아버지 허월의 설득으로 군을 물리지만 그 뒤에도 여전히 왕건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견훤]]이 서라벌을 침공해 그곳을 유린한 후 경애왕을 자살시키고, 경순왕을 올리며 신라를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고, 신라를 구하러 온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고려가 대패하며 겨우 살아돌아오는 일이 벌어지자 견훤을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인지 왕건을 직접 찾아와 충성을 맹세한다. 당시 기세가 잔뜩 꺾여있던 왕건에게 순식의 귀부는 그야말로 어둠 속 한줄기 빛과도 같았기에 [[개성 왕씨]] 성을 [[사성]]받아 왕순식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또한 대광을 역임했는데, 지방세력 중에서는 유일하게 최고직인 대광을 하사받은 것이다. 936년에는 기병 2만을 이끌고 [[일리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그가 만 단위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고도 하는데, 이를 보면 그가 단독으로 커다란 세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시금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