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릉 (문단 편집) === [[당]] === [[진나라|진대]] 및 [[한나라|한대]]의 대규모 황제릉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즈음해서 다소 작아진다. 아무래도 통일된 중원국가의 역량과도 관련이 있어보이는데 다시 [[당나라|당]]에 의해서 중원이 통일되면서 부터는 상술한 것과 같이 아주 거대한 능원의 대규모 황제릉을 축조하기 시작한다. 산릉이라고 하는 즉, 산 하나를 무덤으로 삼아 그 주변을 능원으로 삼는 방법을 택한다. 중국 [[서안시]]가 자리한 분지의 북쪽에 당나라의 황제릉이 열상으로 배치되어있으며 그 범위는 서안시를 뛰어넘어 옆 도시까지 이어진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시]]부터 시작해서 [[경산시]]까지 황제릉이 줄지어 있는 셈.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황제릉은 북조 양식대로 봉분을 쓴 다음 남조의 양식대로 앞쪽에 화표석과 각종 석물을 깔아두었다. 이후 당태종의 [[소릉]] 이후 인산위릉 이라 하여 산을 능의 봉분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본래 한나라 시절 제후왕의 것으로 유비의 조상인 [[중산정왕]]의 묘라고 알려진 만성한묘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전성기의 황제릉은 산을 능체로 한 뒤 수키로미터에 걸친 장방형의 성곽을 두르고 각 모서리에는 각궐을 세웠다. 그리고 사방으로 사신의 이름을 딴 문을 내고 각각 석물로 장식해 두었다. 남쪽으로는 역시 수킬로미터의 신도를 내고 각종 석물과 화표석으로 아주 멀리서부터 황릉임을 알 수 있도록 장식해두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두개의 봉우리에 각각 유대(乳臺)를 두었다. 이후 쇠퇴기에는 다시 초기처럼 방형의 성곽과 원형의 봉분을 갖춘 봉분형 황릉으로 돌아오게 된다. * [[당나라|당]]의 계보표의 묘호 참고 이런 당의 능원제도는 신라의 능원제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당의 능원제도를 도입하여 왕릉을 축조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7~8세기대 왕릉인 [[흥덕왕릉]]과 [[괘릉]]이다. 특히 흥덕왕릉은 당나라의 황제릉의 능원을 제외한 모든 구성요소를 미니어쳐판으로 적용한 사례이다. 물론 신라식의 해석이 덧붙혀져 완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