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둥싱 (문단 편집) === 화궈펑과 손을 잡다 ===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마오쩌둥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 공산당 중앙 제1 부주석은 [[4인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 11일, 화궈펑은 리센녠, [[예젠잉]], [[녜룽전]] 등과 함께 사인방 문제를 논의했다. 왕둥싱은 화궈펑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고, 베이징 위수구 경호대장이자 정치국 위원인 그의 합류로 인해 화궈펑의 세력은 사인방을 압도할 수 있었다. 9월 21일, 화궈펑은 예젠잉과 밀담한 후 '격리심사' 방식으로 강경하게 해결하기로 잠정적으로 결론내렸다. 또다른 정계의 거물이었던 [[천윈]]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대세가 기울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따르기로 했다. 10월 6일, 왕둥싱은 8341부대를 이끌고 중난하이 개인 숙소에 머물고 있던 [[장칭]]을 긴급 체포했다. 그후 화궈펑은 '마오쩌둥 선집 5권'을 검토한다는 명목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회인당에 부르고 그들이 회인당에 오자마자 체포했다. 이로서 마오쩌둥의 최측근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4인방은 몰락했고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왕둥싱은 1977년 3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마오쩌둥의 저서 편집 출판위원회 사무실 주임 겸 당서기를 맡았다. 또한 1977년 3월부터 1982년 4월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제1부총장을 겸임했으며 1977년 8월 중국 공산당 제11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당겨 소집하여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붕국 공산당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넨에 이어 당내 서열 5위였다. 1977년 2월, 왕둥싱은 화궈펑의 '양개범시론'을 적극 지지하는 사설을 개재했다. 그는 사설에서 "마오쩌둥의 모든 결정은 확고하게 옳으며, 우리는 항상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시롄(陳錫聯), 지덩쿠이, 천융구이(陳永貴)와 함께 '범시파'를 형성하여 화궈펑의 주요 지지자로 활동했다. 그는 화궈펑이 마오쩌둥이 지명한 유일한 후계자이니 마땅히 그의 뜻에 따라야 하며, 덩샤오핑은 1975년에 마오쩌둥이 총리 직에 적합한 지 시험해봤지만 좀 빠진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으니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 반당분자로 낙인찍혔던 [[보이보]], [[펑전]]을 정계에 복귀시키는 것에 대해 "지하에 계신 마오 주석께서 어찌 생각하시겠는가. 또 세계는 우릴 어떻게 보겠는가."라며 반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