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권신수설 (문단 편집) == 당시의 반론 == 왕권신수설과 상반되는 해석이 중세 초반에 존재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세속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일단 신국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요 참된 권력이라는 이유를 들어 세속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었다. 로마의 기록 중에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법정에서 이런 신념을 피력했다는 구절이 있다. 대표 저서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권력이 근본적으로 악하지는 않다는 포용적 입장이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구분해서, 인간 세계의 권력을 인정함이 신의 참된 주권을 침해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신이 어떤 식으로든 인정한 것이므로 역시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계속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반국가적인 종교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초대교회 호교론의 상당수는 "우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만 로마 제국의 방침을 따르지 않을 뿐, 다른 점에서는 로마의 선량한 신민들로서 모범적으로 삽니다"라는 식이다. 왕권신수설의 영향은 왕실의 의식이나 예법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왕은 반대로 신민들에게 있어서 신과 같은 위엄과 자비를 보이는 것이 권장되기도 했다[* 이런 왕권신수설은 그저 선전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백성들한테 상당 부분 파고 들었는데, 실제로 17세기 프랑스 농촌에서 세금을 걷으러 간 징세관을 상대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나온 구호가 "'''국왕 만세, 징세관은 꺼져라.'''"였다. 이는 조선과 중국 같은 동양에서 굶주린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타도할 대상을 임금 주변의 간신들로만 한정짓고, 정작 임금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충성론과도 통한다.]. 한편 이를 강조하기 위해 왕실에서는 하층민들에게 왕이 병든 부랑자를 어루만지니 병이 나았다는 등의 설화를 은근슬쩍 퍼뜨리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 그의 '성혈'을 마시려고 빈민들이 [[기요틴]] 아래로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이것은 꼭 왕권신수설과의 연관성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의 상황일 수도 있다. 중세 당시에는 대중들 앞에서 사형을 집행할 시 근둥들이 망나니 칼에 목이 잘린 참수형자들의 목에서 나오는 피를 수건에 적셔 마시거나 하는 등의 행위들을 이는 병을 치료하거나 하는 주술적 의미를 당시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병자를 치료하는 [[구세주]] 흉내를 냈던 것은 [[샤를 10세]]였다. 세속적 통치 권한을 정당화하는 왕권강화 이론은 전세계에 흔히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가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통 신화나 [[불교]], [[유교]] 등이 왕 중심의 이론으로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다.[* 다만 유교 사상의 경우 왕이 잘못을 할 경우 간언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모범으로 보았고, 역성혁명을 어느정도 긍정하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에서도 왕권을 무제한적으로 긍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