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공족 (문단 편집) === 왕공족의 친일성 희석 === 해방 후 한반도에 민중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선 뒤, 사상에 따라 자신들의 편으로 포섭할 가치가 있는 군인이나 인텔리 세력보다도 더 증오받았던 것은 일본 제국의 일원이었던 조선 왕공족이었다. 봉건주의를 혐오한 북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이들의 입국조차 금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되며 '역사적 정통성'과 '민족문화의 자부심' 같은 맥락에서 구 조선 왕실에 대한 반감이 희석되었다. 또한 2006년에는 <궁>과 같은 가상 황실 드라마가 방영되며 황실 복원에 대한 열망도 고개를 들었을 정도였다. 역사연구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당시, 귀족 작위를 받은 많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인사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 오른 데 반해 왕공족은 친일 논란에서 큰 주목을 받지 않았고 도의적으로 등재를 피해가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당시 한국인들 중 일본군 장교 출신 상당수가 친일파로 분류되었으므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에 복무하였던 왕공족 또한 명단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느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논의 끝에 망국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은 타당하나, 이들은 일본이 별다른 마찰 없이 대한제국을 편입하기 쉽게 하려고 왕공족 작위를 만들어 그들을 대우하였지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또 초대 운현궁 [[흥친왕|이희]]과 2대 운현궁 [[영선군|이준]]과 같이 친일 행위자 명단에 오른 이와 2대 사동궁 이건공처럼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도 있지만, 초대 사동궁 [[의친왕|이강]]처럼 독립 운동의 의사를 보이거나 혹은 그의 아들 2대 운현궁 [[이우]]처럼 반일 의식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인물도 있기 때문에 모든 왕공족에게 친일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왕공족들이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이 지위에 안주해 독립 운동에 반대 내지는 소극적이었다. 이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독립 운동 중에도, 해방 이후에도 왕실 복구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지위적인 특성 때문에 나라를 판 장본인은 고종이고 이완용 등은 하수인 내지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해석도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자들은 왕공족에 있던 이들은 왕공족에 들어갔다는 이유가 아닌, 실질적인 친일 행적이 있는지 여부로 친일파인가를 판단했다. 다만, 같은 식의 역사학적 관점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있어 동일하게 적용되었는지는 비교하기 쉽지 않다. ([[친일인명사전]] 문서의 논란 문단 참조) [[영친왕]]과 [[이건]]은 1947년 신적강하 전까지 왕 및 공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우는 전쟁 중 원폭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쭉 조선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영친왕과 이우는 워낙 어릴 때 일본에 간지라 [[인질]]에 가깝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 일부는 이들중에 아무도 독립운동가가 되지 않은 것에 비판을 하지만, 이들은 아예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다. 일제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왕공족의 망명은 큰일날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감시를 피해 망명을 시도하여 독립운동을 진행시키려한 고종과 의친왕이 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비판이 필요한 것보다 많은 점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