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완풍대군 (문단 편집) == 생애 == 1330년(충숙왕 17년)에 환조 [[이자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원계가 4살 때 죽었고 이자춘은 [[의혜왕후|최씨]]와 결혼하여 이성계를 낳는다.[*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보》.] 또 이자춘은 김씨와도 결혼하여 [[의안대군(이화)|이화]]를 낳는다. 완풍대군 이원계는 환조 이자춘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생모 한산 이씨가 이원계가 4살때 일찍 사망하자, 천호이면서 부유한 최한기의 딸 [[의혜왕후|최씨]] 아래서 자라면서 후계자 경쟁에서 무력이 뛰어난 이성계에게 밀렸고, 조선 건국 후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성계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서장자로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 추측이 아니라 문헌 증거가 있다. 군공과 혼맥을 바탕으로 고려의 권신으로 자리잡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전 당대 석학 목은 이색에게 아버지 이자춘의 신도비 작성을 의뢰한다. 이색이 지은 이자춘 신도비 원본(1387년, 우왕 13년 작성)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공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三娶].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원계(元桂)이다. (중략)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는데 증 문하시중 영흥부원군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성계(成桂)라고 한다. (중략)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를 봉하였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화(和)라고 한다. - [[동문선]] 제 119권[[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1365A_1190_010_0040&viewSync=OT|#]] 이원계의 이름에 으뜸원 元을 사용하는 실질적 장자가 맞으며, 한국사 전체로 보아도 넉넉하게 명장 클라스에 들어가는 동생 이성계보다 무인으로서 자질은 열세였으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결혼 풍속을 따른 환조 이자춘은 15세에 당시 기록에 남을 유력한 집안이 아닌 첫째 부인을 두어 2남1녀를 낳았고,한산이씨가 사망(1334년) 후 재력이 있고 정치적으로 유력한 천호 집안인 조조(후에 최한기로 개명)의 딸과 재혼(1334년)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세워지고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태조 이성계의 제1비인 신의 왕후 한씨 소생인 태종 이방원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제거한 명문에서 적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이원계는 사후 개국공신 녹권에서 위화도 회군이 있던 해에 사망한 이원계는 제외되고, 태종때 작성한 태조실록, 신도비 등의 자료부터 한산이씨(이원계 4세때인 1334년 사망, 환조는 의혜왕후와 재혼 후 1335년 태조 이성계 출생 )는 제1부인이라는 말 대신 측실이란 표현이 생겨난다. 이에 대한 이원계의 장남 안소공 이양우는 병을 핑계로 등청을 하지 않는 등 강력한 불만제기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안소공 이양우의 경우 공식적인 기록에는 회안대군 이방간과 연락한 것 때문에 귀양을 간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이 가족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1361년 [[홍건적]] 20만이 고려를 침공해 [[공민왕]]이 파천하고 [[개경]]이 함락되었다. 고려는 [[안우]], [[이방실]], [[김득배]] 3원수를 중심으로 개경 수복에 나섰는데 이원계는 안우 밑에서 종군해 조천주, 정리(鄭履), 장신보(張臣輔), 홍선(洪瑄), 정선(鄭詵) 등과 함께 보기 400을 거느리고 박주로 진격해 홍건적 100여 명을 참했다. 이 공으로 2등 공신에 녹훈. 척산군에 봉군되었다. 1377년 왜구가 강화를 노략질하자 [[나세(조선)|나세]] 등과 함께 이를 요격했다. 1380년에는 원수(元帥)로서 전라도로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동년에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로 재직하면서 [[변안열]]과 함께 이성계와 남원과 운봉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여 이겼다. [[황산대첩]]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해 함께 싸웠다. 1388년 제2차 요동정벌 때 우군도통사 이성계 밑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원정을 떠났으나 위화도 회군이 벌어졌고 바로 그 해에 사망. 무덤은 함흥의 정릉(아버지 이자춘(환조)의 능)의 우측에 있으며 선원사와 북청의 삼의사에 모셔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