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완안승유 (문단 편집) == 생애 == 생년 미상이다. 중도 좌경순부사로 임명되었고, 중도의 호적을 관리하던 중 백성들은 그가 매우 평범하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전중시어사로 승진하여 우경순사, 창덕군 절도부사, 형부원외랑으로 임명된 뒤 본부낭중으로 임명된다. 이후 회주, 혜주자사를 거쳐 동지임황부사, 동북로초토부사로 임명되나 병을 얻어 면직되었다가 서남초토부사로 임명된다. 1206년 [[한탁주]]의 북벌에 맞서 송을 공격하였고 진주방어사 완안린과 함께 농서 성기에 주둔하였다. 남송의 [[오희(남송)|오희]]는 5만 명을 이끌고 보차, 고소 등지에서 신속하게 진주를 기습했다. 완안승유와 완안린은 기병 천여 명을 이끌고 오희의 군대를 격파하고 40리를 추격하는 등 모두 6번의 전투를 치렀고, 송군은 대패했고, 완안승유는 4천여 급을 참수했다. 오희는 그의 장수 풍흥, 양웅, 이규를 보내 보병기병 8천여 명을 이끌고 적곡으로 들어가자 이에 맞서 완안린과 하주방어사 포찰병현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여 송군을 대파한다. 남송의 군대는 서산으로, 기병은 적곡으로 패주했다.[* 오희는 금에 투항해 촉왕으로 봉해지나 이후 주살당한다.] 이후 완안승유는 당괄(唐按)을 답해에 파견하여 기병 200명을 이끌고 남송의 보병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몽괄이 앞장서 송군의 적진에 진입하여 송군은 크게 패하였다. 이후 성 밖까지 추격해 송군 2,000여급을 참수한 데 이어 성주를 함락시켰다. 1208년, 남하하여 송나라를 공격하던 군대가 회군하자[* 남송에서는 이때 한탁주가 주살당하고 [[사미원]]이 정권을 잡았음] 하남동로통군사로 자리를 옮겨 귀덕의 사정을 겸하였고 곧 임황부로 자리를 옮겼다. 금대, 예물 십단, 은 백오십 냥을 하사받는다. 대안 초년에 어사중승으로 봉해졌다. 1211년, 참지정사(知知政事)에 봉해져 평장정사 독길사충(獨吉思忠)과 함께 서북수변에서 몽골을 방어하였다. 오사보 전투에서 대군이 패배하자 조정은 독길사충을 처치하고 완안승유가 방어의 군사 배치를 주관하게 했다. 독길사충의 뒤를 이어 승상으로 임명된 후 30만 명의 주력을 이끌고 항주, 창주, 무주 3주를 야호령으로 후퇴시켜 산지 지형을 이용해 몽골군의 기병 우위를 억제하려 했으나 몽골군에게 격파당하였고 완안승유는 단신으로 도망쳐 선평 일대로 물러났다.([[야호령 전투]]) 1212년 섬서안무사로 기용되었고 지녕 원년인 1213년에는 우감군 원수로 옮겨 함평부로 병마도총관을 겸하던 중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맞서나 패한 이후 동년(정우 초년) 임해군절도사로 재직 중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