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와규 (문단 편집) ==== 키시 히로시(1975)의 논문 ==== 미시마소의 기원을 철저히 파헤친 논문으로는 키시 히로시(岸浩) 1975년 논문 '천연기념물 미시마 소의 기원에 관한 연구(天然記念物見島牛の起源に関する研究, 獣医畜産新報, no.652, no.653)'이 있다. [[파일:kishi1975.jpg]] 키시 히로시의 논문, 첫 페이지(1975). 일단 미시마 소의 제주 흑우 기원설을 검토하기에 앞서, 미시마 소가 일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위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미시마 소가 일본 본토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후쿠다 시게오(福田茂穂)이라는 아부군(阿武郡) 농업기수(農業技手, 기수는 판임관으로서, 일본 제국의 하급 공무원)에 의해서였다. 후쿠다 시게오는 1923년(大正12년) 10월 은퇴하였는데 그는 1923~1924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미시마 섬에 조선 소를 닮은 소가 있다'는 [[http://archives.pref.yamaguchi.lg.jp/msearch/cls_detail.php?op=detail&t=2&id=120158&pg=15&odr=711&c=50|조사서]]를 보고하게 된다[* 즉, 제주 흑우 기원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 정부가 몰래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 공무원이 먼저 '조선소와 닮은 소가 있다'고 상부에 보고한 것에서부터 천연기념물 지정이 시작된 것이다]. [[야마구치현]] 소속의 공무원인 이와네 마타시게(岩根又重)은 이 조사서를 일본 정부의 천연기념물 조사위원인 와타리세 소오사부로(渡瀬荘三郎)에게 보고하고, 와타리세 소오사부로(渡瀬荘三郎)은 1927년(昭和2년) 6월, 이틀에 걸쳐 미시마 섬에 현지 방문하였고 이후 1928년 9월 20일자 내무성 고시 249호(관보 522호)에 의하여, 미시마 소는 미시마 [[거북이]]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게 된다. 하지만 조사위원이었던 와타리세 소오사부로는 조사보고서에서 천연기념물 지정사유에 대하여 '일본의 특유한 축산동물'이라는 천연기념물관련 법조문만을 기재하였을뿐, 미시마 소가 왜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지 구체적인 사유를 기재하지 않은채 1929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1930년 돗토리 고등농업학교(鳥取高等農業学校) 모토하시 헤이이치로(本橋平一郎)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돗토리 농학회보(鳥取農学会報) 게재함을 시작으로, 미시마 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러던 중 1971년(昭和 46년), 일본 문화재청이 감수한 [[천연기념물]] 사전에서 미시마소가 한반도로부터 전래했다는 문장이 기재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한국에도 전해져 제주 흑우 기원설이 되었다. 키시 히로시(1975)에서는 결론적으로, 미시마소가 한반도 기원이라는 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가 그동안 각 종 논문 등에서 제시된 한반도 전래설의 주요 근거를 정리한 바는 아래와 같다. * (1)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따르면, 其地無牛馬虎豹羊鵲, 즉 일본 땅에는 소, 말, 호랑이, 표범 등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는 본래 소가 없었으니 일본 소의 조상은 외국, 그중 가장 가까운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이다 * (2) 미시마 섬은 한반도와 일본의 사이에 위치해있으며 말을 키운 역사가 없음에도 코마(駒,コマ) 같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고려]] 혹은 [[고구려]]와 연관이 있는 등 한반도와 일본의 중간 교류지 역할을 하였다. * (3) 미시마 소의 털색(검은색)과 작은 체형은 한국의 소와 유사하다 * (4) 일반적인 소의 사역 방식(축사의 上板)이 한국식이다 * (5) 소를 사역할 때 쓰는 용어가 한국어와 비슷하다 * (6) 미시마 섬의 적석총(지콘보 고분군)의 모습과 출토품이 한국식이다 * (7) 미시마 섬 내에서 조선의 화폐인 영락통보(永樂通寶)가 출토된다. 이 중, (7)의 영락통보는 본래 명나라 화폐였으며 일본 본토에서 널리 쓰인 바 있으니 별도로 논할 가치가 없다. 키시 히로시가 각 항목별로 반박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보다 자세한 논거를 확인하려거든 논문을 직접 참고하는 것이 좋다. * (1)-a.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이미 [[고훈 시대]] 이전의 유적지에서부터 일본열도에는 소뼈가 발굴된다[* 참고로 2016년 발간된 Mason's World Encyclopedia of Livestock Breeds and Breeding(6판)에서도 기원후 2세기 경 일본에 소가 도입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기원후 3세기 경 일본에 소가 없었다는 삼국지의 기록은 신뢰할 수 없으며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 본토에 소가 있었음은 더이상 논쟁거리도 아니다.[* 단 위지왜인전의 저 말은 말 그대로 일본에 아예 소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소가 희귀했는데 도래인에 의해 여러 종류의 소들이 유입되면서 헤이안 시대에 이르러 소가 번성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게다가 위처럼 2~3세기에 일본 열도에 소가 살았다 해도 결국 그 소는 기원전부터 일본 열도로 이주한 한반도인들이 들여온 것이라는 결론이 난다.] * (1)-b.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기략(日本紀略) 등의 사서의 기록을 검토하자면, 당시 일본에 소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일본서기에는[[물소]]의 수입이나 야생 소까지 언급되어 있다. 일본서기 등이 신뢰성에 의심을 받는 것은 연대조작이나 지나친 자국중심적 사관때문인데 이건 그런 케이스가 아니다. * (1)-c. 혈액형 Z' 항원의 품종별 출현빈도 연구에 따르면, 미시마 소는 64.5%, 서양소와 일본 재래종의 잡종인 무각화종은 41.2%인 반면, 한반도로부터의 전래가 확실한 고치현의 갈모화종은 13.3%에 불과하여 오히려 미시마 소와 큰 차이를 보였다. * (2)-a. 삼국시대 및 이후의 시대에서 한반도 → 일본의 수도(나라, 교토)에 이동하는 길은 부산 등 한반도 남해에서 출발하여 [[대마도]]와 [[후쿠오카]] 등을 거쳐 혼슈의 남쪽 내해인 [[세토내해]]를 통한 방법이 이용되었다. 한반도에서 미시마 섬으로 가려면 그런 통상적인 루트에서 벗어나 대마도로부터 동쪽으로 약 300km 가야 하고 혼슈의 북쪽으로 가야한다. 한반도에서 미시마 섬까지 그렇게 갈 이유나 기록도 없고, 미시마 섬에서 한반도까지 도달하기에는 미시마 섬의 경제상황이나 항해기술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한반도에서 미시마 섬으로 가려면 겨울의 북서풍을 타고 갔다가 이듬해 봄의 동남풍을 타고 돌아와야하기 때문에 단기간 항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한 번 도착한다면 반드시 장기간 체류했어야 할 것인데, 그런 기록이나 근거가 없다. * (2)-b. 한국의 기록에서 미시마 섬이 등장하는 것은 딱 한 번, 조선시대에 작성된 [[해동제국기]]에서다. 해당 책에서 미시마 섬의 도주는 기축년(己丑年)에 [[대마도]]주에 청하여 한국 사신을 접대하는 역할로 딱 한 번 등장하는데 해동제국기 속 다수의 일본인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전혀 특이한 위치가 아니다. 또한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조선-일본간 항해지도에서도 미시마 섬으로 통하는 항로는 없다. 미시마(箕馬) 섬은 단지 항해중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로만 사용될 뿐이다. * (2)-c. '코마'라는 지명은 [[야마구치현]] 내에서만 42개가 확인되는데 이를 전부 고려, 고구려의 흔적으로 볼수는 없다. 예를 들어, 코마쯔라는 지명이 해안가에 있으며 高麗津, 즉, 고려(고구려)의 배가 드나들었던 항처럼 해석되지만 실제로 코마쯔라는 지명은 바다를 접하지 않은 산간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고마'라는 지명은 말머리 모양으로 움푹 패인 지형에 붙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2)-e. 1964년 미시마 섬 종합학술보고서에 따르면, 미시마 섬은 지질학적으로 일본 열도와 연속되어 있으며 섬의 식물 및 동물, 조개류, 기생충 등 생태계는 서일본 지방과 유사하지, 한반도의 식생과는 무관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미시마 섬에서 일본 본토에 도달하는 것에 비하여 한반도에 도달하는 것은 6.5배의 거리가 소요된다. 따라서 한반도와 문화적, 역사적 교류성은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 (3)-a. 조선우마의방(朝鮮牛馬醫方)에 의하면, 조선의 소 색깔은 황색, 검은색, 흰색, 얼룩색 등 다양하다. 조선우마의방은 그중 황색의 소를 우왕(牛王)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조선 소=흑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 (3)-b. 일본의 다양한 그림 자료에서도 일본 소의 색깔이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고 그중 가장 많은 비중으로 보여지는 것이 검은소이다(1701년의 소(安房牛) 그림에서 55마리를 분석한 결과 42마리가 검은 소였다) * (3)-c. 미시마 소가 본래 검은 소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949년 155마리의 미시마 소를 조사한 결과, 순수하게 검은 소는 84마리(5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얼룩소였다. 1949년 미시마 섬 촌장이 정부측에 '천연기념물 지정 해제 신청'을 넣었는데, 이때도 미시마 섬 촌장이 내세우는 근거 중 하나로서 본래 '미시마 소는 갈색, 얼룩색, 흰색 등 다양했기 때문에 천연기념물에 지정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시 히로시는 따라서 '미시마 소=검은 소'라는 이미지가 얼룩소(서양소)에 대항하는 검은소(일본소)라는 상징을 위하여 천연기념물 지정 이후 점차 검은 색으로 개량된 것이 아닌가하고 추정하고 있다. * (3)-d. 미시마 소가 본토의 일본 소보다 체구가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본토의 일본소가 이미 서양 소와의 잡종화가 상당부분 되었기 때문이다. 1932년 실측된 미시마 소의 체고(키)는 115~122cm인데, 이는 에도 시대의 기록인 牛町由來記에서 언급된 종우(씨 숫소, 種牛)의 체고가 약 92cm인 것에 비하면 오히려 높은 것이고, 1701년에 기록된 安房牛의 체고 기록이 112cm~118cm인 점을 고려하면 딱히 작다고 할 수 없다. * (3)-e. 1973년 다른 일본소와 한국소(1929년 기록), 중국소 3종(1926년 기록), 대만소(1925년 기록) 등 총 13종의 소와 미시마 소의 신체 사이즈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소는 미시마 소와 4번째, 중국소 3종은 5~7번째로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1,2,3번째로 유사한 소는 전부 일본 국내소였다. * (4)-a. [[우역]](牛疫)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도 시대]] 일본 축산업계가 한국측 자료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예를 들어 1399년에 조선에서 집필된 신편우의방(新編牛醫方)은 1756년 우과중보기(牛科重寶記)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그대로 발간되었다. 축사의 상판이나 朱色으로 칠하는 관습 등은 전부 신편우의방을 표절한 우과중보기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이는 다른 일본열도에서도 지역적으로 조금씩 변경된 상태로 확인된다. 미시마 섬의 한국식 축사 역시 이런 지역적 변용에 불과하다. * (5)-a. 미시마 섬에서 소를 부릴 때, '오른쪽으로'라는 구령은 '보(ボー)'라고 하며, '왼쪽으로'라는 구령은 '조(ジョー)'라고 한다. 미시마 소의 한반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측이 이게 한국에서의 구령과 유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특히 한국에서는 소를 전진시킬 때 '이랴'라고 하며, 소를 정지시킬 때 '워'라고 하지만, 미시마에서의 전진은 '조이(チョイ)'라고 하며 정지는 '마(マー)'라고 한다 * (5)-b. 야마구치현 내에서만 비교해도 각 지역별로 구령소리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오른쪽'이라는 구령은 '세, 세이요, 헤세, 헷세, 히요우세, 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즉, 구령소리는 추적불가능한 그냥 방언에 불과하다. * (6)-a. 지콘보 고분군은 이미 몇차례 민간과 정부에서 고고학 조사를 수행하였지만 한반도와 연관되는 유물은 단 한 번도 발굴된 적이 없으며, 그나마 발굴되는 것이 축부 토기(祝部土器) 파편 1점이 발굴된 것인데, 축부 토기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에서 고루 발견되는 것으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또한 기시 히로시는 미시마 소에 관한 가장 중요한 기록을 언급하는데, 1672년에 해당 지역에 침입한 [[우역]](牛疫)으로 인하여, 인근 섬의 소들이 거의 절멸한 기록이다. 이는 당시 서일본을 휩쓸었던 우역의 연장선상이었는데, 미시마 섬의 기록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인근의 다른 섬에서의 소가 말그대로 절멸된 기록으로 보았을 때, 미시마 섬 역시 사정은 낫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 이전에 전래된 소는 당시 이미 절멸했으며 현대에서 확인되는 미시마 소는 그 이후(1673년 이후) 외부에서 유입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유입되었을까 하는 것이 논쟁거리인데, 당시 일본은 쇄국령을 실시하여 외국으로부터 배가 기항할 수 없었고 당시 1671년 [[조선]] 역시 우역으로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A%B0%EC%97%AD(%E7%89%9B%E7%96%AB)|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미시마 섬같은 다른 나라에 소를 지원해줄 여력은 없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한반도와 미시마 섬 간의 거리는 일본 열도와 미시마 섬간의 거리보다 극히 멀기 때문에 미시마 섬 주민들 역시 한반도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673년 이후의 미시마 소는 일본 본토에서 지원해줬을 것이다. 실제로 에도 시대 연간에 미시마 섬은 기근이나 재해, 폭설 등으로 곤경에 빠진 적이 다수 있었고 그때마다 일본 본토에서 도와준 전래가 있기에 가능한 추정이다. 참고로 기시 히로시는 미시마 소가 정말 재래종인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미시마 섬의 소는 인근의 다른 섬보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밀도(가구당 보유하는 소가 3마리 이상)로 있고 그 중 상당수는 암소(1881년 통계에서 미시마 섬의 소중 87%가 암소이었으며 이는 인근의 다른 섬에서 20~50%만 암소인 것과 대비된다)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시 히로시가 미시마 섬의 노인들로부터 채록한 바에 따르면, 미시마 섬의 소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즈모 지방(오늘날의 [[시마네현]])에서 종우(種牛)를 지원받은 것인데, 당시 이즈모 지방의 소는 일본 재래종과 데본종의 잡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년에 한 번 열리는 우시장은 한 달동안 계속된다고 한다. 따라서 기시 히로시는 미시마 섬이 에도 시대 연간에 소를 키워서 일본 본토로 수출하는 목장 섬이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본토에서 불어닥친 서양소 잡종 열풍에서 미시마 소 역시 생산력과 맛이 좋은 이즈모계 소(데본 F1)을 지원받아 키운 것이므로 결국 미시마 소 역시 잡종 소이며 오늘날 남은 순수한 일본 재래종은 없다는 추정을 하였다. 그런 미시마 소가 1928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미시마 소의 도축과 판매가 제한되면서 미시마 섬의 경제와 미시마 소의 가치는 뚝뚝 떨어졌으며[* 1929년 미시마 소의 판매가는 7000엔을 넘었으나 1931년에는 2000엔대로 뚝 떨어진다] 1949년 미시마 섬 촌장이 천연기념물 지정을 해제해달라고 신청한 것 역시 그런 연유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본 항목의 제주 흑우 기원설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기시 히로시의 논문(1975)에 실려있다. 기시 히로시는 1945년(昭和20년) 처음 미시마 섬에 방문하였고 미시마 소의 검은 색과 작은 체구를 보고는 '제주도 소와 똑같다(済州島牛そつくり)'는 첫인상을 말하고 있다(p.1227). 하지만 이내 서양의 홀슈타인 같은 얼룩소의 외양을 지닌 다른 미시마 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2가지인데, 일단 제주도 소는 1945년 당시 일본의 축산연구자라면 알 법한 그런 보편적인 지식이었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강제적으로 기록과 기억에서 삭제된 그런 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기시 히로시는 1925년에 태어나 1988년에 죽은 사람인데, 당시 연구를 막 시작한 20세의 대학생 기시 히로시도 제주 흑우를 알고 있었다면 당시 제주 흑우에 대한 지식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일제가 제주 흑우를 데려다가 일본 고유의 미시마 소로 억지로 세탁했다면 이는 제주도 소를 기억하고 있는 당시 다수의 축산연구자들에 의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기록이 남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오히려 제주 흑우는 일본으로 반출된 1924년 이후 태어나서 막 공부를 시작한 대학생조차 알고 있는 학문적 상식이 된 것이다. 또한 알 수 있는 점은, 1945년 당시 미시마 소의 외양 중 흑우는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는 1949년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미시마 소의 제주 흑우 기원설의 전제는 미시마 소가 제주 흑우처럼 새까만 소라는 것인데, 실제 미시마 소를 관측한 사람과 미시마 소를 키운 사람에 의하면 미시마 소는 오히려 다양한 색깔에서 흑우 일변도로 점차 개량된 것이다. 따라서 미시마 소의 제주 흑우 기원설이 맞으려면 제주 흑우 역시 과거의 미시마 소처럼 다양한 색, 최소한 얼룩색도 포함하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1945년 기시 히로시의 방문시에도 얼룩소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았을때, 당시 개량은 완전하지 않았고 와규의 흑모화종 품종이 엄격히 정해진 것이 1944년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와규의 흑모화종 형성에 미시마 소가 기여한 바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 기시 히로시의 위 논문이 계통학 연구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생물학적 논의보다는 대부분 지리, 역사적 관점에 근거하여 작성된 성격이 커, 계통학 관련 논문임을 표방하는 논문 제목과는 달리 여타 우제류 계통학 관련 연구들에 비해서 전문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기시 히로시는 동물 계통학 분야의 권위자가 아니라 소의 질병(牛疫)을 주로 연구하는 수의사이므로 기시 히로시의 연구가 정설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많은 일본 학자들이 일본에 있는 많은 동식물이나 문물, 풍습 등의 한반도로부터의 유래를 부정하고 대신 그것들이 일본 자체 기원이거나 중국 양쯔강 유역 또는 동남아시아 기원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야요이인이나 일본 벼농사의 기원이 세계적으로 정설로 인정되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양쯔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기시 히로시도 일본 소가 한반도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고 있어 그러한 학자들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학자나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한반도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식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며, 설사 그 영향이 사실로 확인된 것도 숨기려 하며 심지어 그러한 영향이 명시된 자국의 문헌도 '근거가 없다', '저자의 착각일 뿐이다'라며 서슴없이 부정하는 경우도 흔하다. 일례로 일본에 유구하고 한반도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구석기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유물을 몰래 파묻고 자신이 처음 발견한 마냥 조작하다 세계적으로 대망신을 당한 [[후지무라 신이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