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양행궁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온양행궁 혜파정.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제강점기 온양행궁 영괴대.jpg|width=100%]]}}} || || {{{#gold '''흥선대원군 시기에 지은 혜파정[*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gold '''일제강점기에 찍은 온양행궁 영괴대와 회화나무의 모습'''}}} || 《[[조선왕조실록]]》에는 첫째 임금 [[태조(조선)|태조]]부터 온정을 자주 찾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는 처음에는 주로 [[황해도]] [[평산군|평산행궁]]에 있는 평주온정을 이용했으나 [[한성부|도읍을 옮긴 뒤로는]] 300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신하들이 자제할 것을 청했다. 태조는 저런 반응을 불편해했으나, 애초에 본인도 멀다고 느꼈으므로(...) 차츰 덜 찾았다. 1396년(태조 5년)에 [[충청도]] 온정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한 지명은 없지만 이때부터 온양온정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도]]에 온정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아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종(조선)|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온양군의 온정에 대해,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우리 '''[[태조(조선)|태조]]''', [[세종(조선)|세종]], [[세조(조선)|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후략)'라고 쓰인 것을 보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이후 [[태종(조선)|태종]]과 [[세종(조선)|세종]]도 [[평산군|평주]], [[이천시|이천]] 등에 있는 [[온천|온정]]을 찾았으나 뛰어난 [[치료]] 효능 및 [[한양]]과 가깝다 등의 이유로 온양으로 떠나는 횟수가 늘었다. 그래서 [[세종(조선)|세종]] 때에 행궁을 세웠다. 세종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정을 비롯한 여러 효험이 있다는 물이 나는 장소들을 찾았으며, 이에 온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초수행궁 건축을 감독했다. 세종은 이러한 공사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을것에 대한 우려로 인해서 상당히 작은 규모로 [[행궁]]을 건립했다. 이 행궁이 바로 온양행궁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했고 이 때 불에 탔다. 이후 오랫동안 터가 방치되었고, 결국 왕들의 [[온행]]도 끊겼다. 임금이 다시 온양을 찾은 것은 [[현종(조선)|현종]] 때였다. 당시 현종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폐허로 남아있던 온양온정을 선택하고[* 《[[현종실록]]》을 보면 '평산 온정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 고 젹혀있다.], 이후 무려 5차례나 온행을 했다.[* 왜 무려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수는 있겠지만, 당시 왕들은 신하들의 간청으로 온행을 많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5번이나 갔다.] 이때 복구했다. [[현종(조선)|현종]] 이후 [[숙종(조선)|숙종]], [[영조]]를 거쳐 [[사도세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95년간 왕과 세자가 활발하게 이용했다. 그러나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잠정 중단되었다. [[정조(조선)|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추억이 깃든 온양행궁에 영괴대라는 단을 설치했다. 사도세자가 직접 심은 3그루의 [[회화나무]]를 정비했으며[* 2그루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살아남았다. 현재는 한그루만이 남아 행궁 터를 지키고 있다.]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했다. 이후 비록 행궁은 많이 퇴락했지만, [[순조]]가 즉위하고 1834년에 온 조수삼의 《온정기》에 의하면 이 무렵까지 행궁은 관리를 받으며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종 8년인 1871년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내정전이 관리 소홀로 무너져 철거됐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을 지었고,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왕실에서 활발히 사용했다. [[임금]]이 안 찾는 [[비수기]]에는, 왕의 전용 공간과 [[동궁|세자궁]] 침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백성들도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또한 [[재상]] 및 [[사대부]]가의 부녀 또한 남쪽 탕에 한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여 일반인들도 온정욕을 즐길 수 있게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총독부 온양행궁.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온양행궁 일제강점기 모습(온양관).jpg|width=100%]]}}} || || {{{#gold '''조선총독부의 지리조사 자료에 나오는 온양행궁'''}}} || {{{#gold '''일제강점기 온양관으로 사용할 당시의 모습'''}}} || 그러나 1904년([[광무]] 8년)부터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온양행궁의 소유권을 가져오면서 대부분인 건물들을 헐고 그 터에 대중탕과 여관을 겸비한 '신정관'과 '온양관'이라는 온천숙박업소를 지었다. 이후 탕실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바뀌었다. [[http://ionyang.com/default/article_print.htm?board_data=aWR4JTNEMzM4NTElMjZzdGFydFBhZ2UlM0QlMjZsaXN0Tm8lM0QlMjZ0b3RhbExpc3QlM0Q=%7C%7C&search_items=cGFydF9pZHglM0QxMzc=%7C%7C|#]]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1 00-32-55.jpg|width=100%]]}}} || || {{{#gold '''1920년대의 온양행궁 전경'''}}} || 이렇게 점차 옛 모습을 잃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불이 붙어 완전히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