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달 (문단 편집) === 최후 === 이후 590년,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자 온달의 손위 처남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온달은 40여년 전 [[양원왕]] 때 [[신라]]에게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4세기 [[광개토 대왕]]의 남진 정책으로 남한강 상류 58성을 차지한 고구려지만 551년에는 신라 거칠부에게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기고 만다. 이후에도 잦은 신라의 침범이 이어지자, 마침내 온달은 총사령관이 되어 남정군을 이끌고 간 것이다.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甞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수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삼으니, 그곳의 백성들이 애통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시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병사를 주신다면 한번 쳐들어가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 >온달, 《[[삼국사기]]》 온달 열전 中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이서(以西)[* 사실상 이 지역은 죽령 이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에, 죽령 이북이라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죽령은 당연히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 땅을 되찾지 못하면[* 온달의 최종 목적지는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는 [[단양군]]과, 단양과 같은 생활권인 [[제천시]] 지역을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실제로 [[남한강]] 상류인 제천-단양을 장악하면 한강 하류 일대에 있던 신라 영토는 신라 본국과 [[월경지]]로 절단 당한다.] [[사망 플래그|살아 돌아오지 않겠다]]!(“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온달산성]][*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아단성(阿旦城)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에서 전사했다. 그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잠시 회복했었다는 말이 된다.[[http://world.kbs.co.kr/service/contents_view.htm?lang=k&menu_cate=history&id=&board_seq=64284&page=74&board_code=|바보 온달, 전장에 나서다]] 다만 이 기간에도 신라와 수나라는 여전히 양국의 사신이 왕래했고, 수도가 [[동해]]안에 있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받지 않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려면 경주부터 한강 하류까지 [[남한강]] 루트가 연결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온달이 수복한 지역은 적어도 죽령 이북 전체까지는 아니고 조금 더 작았을 것이다. 이를 죽령 이북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권리를 강조하기 위한 약간의 과장이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했다. [[신채호]]는 이 부분을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비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사실성을 부정했다. 그는 운구하는 사람들이 '실패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던 온달의 다짐이 생각나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며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공주가 전투 현장에서 졸도해 온달과 함께 그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낮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고 신채호는 적었다.]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노했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의 사위 온달의 전사극(戰死劇)이 연출되어,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중략)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 · 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 >《[[조선상고사]]》 온달의 죽음으로 인해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이 더 좋지 않게 되면서 이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신라에게 협공을 가한다. [[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등 온달 이후로도 고구려는 꾸준히 신라의 북측을 공격했으며 이 때 고구려는 김유신이 충청도의 고구려의 성을 공략했을 정도로 강원도를 주 경로로 하여 충청도에도 세력을 투사하였다. 특히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되찾은 걸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