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달 (문단 편집) === 그 외에 === * 설화가 정말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 사람이고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유명하지 않은 특이한 인물이다. 역사 좀 안다는 사람들도 '''[[을지문덕]]과 [[온달]]이 동시대 인물'''이라고 하면 놀라는 경우가 다수.[* 사실 꼭 이들만 그런 게 아니고 삼국시대 말기의 3대는 정말 소위 말하는 삼국시대의 영웅호걸들과 설화의 주인공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다. 신라는 [[진흥왕]],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 [[자장법사]]의 시대였고, 백제는 [[무왕]], [[선화공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음), [[계백]], [[의자왕]], [[흑치상지]],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평원왕]], [[평강공주]], 온달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도 없다.][* 이랬던 이유는 사실 이전까지의 삼국시대는 이름만 삼국시대였지, 근초고왕의 전성기(4세기)가 끝난 후 6세기 말까지, 광개토대왕 즉위년(391년)부터 551년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160년간 '''압도적이고 패왕적인 고구려의 강대한 위세에 신라와 백제는 성읍국가로 전락할 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슈퍼 헤게모니가 온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민간의 설화로 남을 정도로 위대한 전쟁영웅이 나올 수 없는 게 당연하다.] * 한국사에서 그야말로 여자 잘 만나 인생 확 편 사람의 아이콘격의 인물이다. 다만 본인이 무능한데 아내 덕과 빽으로만 출세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온달은 아내의 조언을 잘 귀담아들었으며 기마 실력과 무예도 충분히 갖춘 사람이었고 전쟁에서 큰 활약을 세울 수준의 기량도 있었다. 온달이 [[부마]]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왕이 인정할 정도로 큰 무공을 그 자리에서 스스로 세웠기 때문. 숨겨진 천재 혹은 아내 밑에서 엄청 노력한 [[노력충]]이다. *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인다. 즉, 잘난 여자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 믿는 남자들을 빗대어 '''바보 온달 컴플렉스'''라 한다. 또다른 은어로 아예 '''온달'''이 있는데 '''여자친구 혹은 아내보다 못난 남자'''를 뜻한다. 근데 따지고 보면 온달은 능력은 있었어도 조력자를 못 만나던 남자가 결혼 잘 해서 출세한 케이스인데, 바보 온달 취급을 받으려면 적어도 남자 쪽에 잠재력이 있어야 정상이다. 즉 바보 온달이 아니라 트로피 허스번드 내지는 무능한 공처가라고 불러야 의미가 정확해진다. * 충북 단양군의 [[온달산성]]과 석회동굴에 이름을 붙인 온달동굴에서 매년 10월초에 온달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봉성 온씨를 위한 사현사가 있다. 금구 일대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이 많이 정착한 곳으로, 봉성 온씨의 관향도 이곳에 있다. * 2021년 3월 온달 장군이 시조인 금구(金溝) 온씨 문중이 자신들의 족보를 대전 한국족보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족보박물관 심민보 학예연구사는 “온달 장군을 시조로 모시는 온씨 집성촌이 전북 김제 금구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수소문한 끝에 문중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다”며 “역사적 인물인 온달 장군 관련 소중한 자료이니만큼 기증해달라 요청했더니 문중 측에서 흔쾌히 응했다”고 말했다.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금구 온씨는 전국에 1581명이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21103#home|#]] * [[고구려-당 전쟁]]에 참여한 고구려의 장수 [[온사문]]이나 [[신라]]인인 [[온군해]][* 단 사극에서 '''온군해'''가 온달의 아들로 나온 적이 없다. 연개소문에서 '''온군'''이라는 캐릭터가 온달의 아들로 서술된 적은 있었다.] 등이 같은 [[온씨]]라는 점에서 온달과 혈연관계라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있으나, 당대의 관련기록은 없고 사실여부는 불명이다. * 무덤의 위치와 관련해 한때 단양군에 있는 방단적석 [[유구]]의 '태장이묘'가 온달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발굴 조사결과 유품이나 매장과 관련된 시설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시대 불탑의 다른 형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양말고도 안동이나 경북 북부에도 이런 시설들이 있다. [[전 구형왕릉]]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다.] 북한 학계에서는 위치와 벽화를 보고 추정하여 평양 진파리4호고분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무덤으로 주장한다. 중국 어디엔가 있다고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학계에서는 그야말로 뜬구름을 잡고 있는 모양. *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부흥을 일으킨 뛰어난 장수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 2017년 7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https://m.sedaily.com/NewsView/1OHEFASJZ0/GG0601|#]] * 그의 부인 [[평강공주]]와 함께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충청북도]] [[단양군]]의 [[지자체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wangiandjini.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청북도 단양군 온달&평강.png|width=100%]]}}}|| || [[광진구]](광이&진이) || [[단양군]] || *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온달전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문장가 [[김택영]]은 나라가 기울자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는 당시 한반도 역대 문장가 9명을 뽑고, 그들의 글 가운데 대표작을 가려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김택영이 뽑은 첫 번째 문장가가 [[김부식]]이었고, 그의 문장 6편이 골라졌다. '동문선'에 실려 전해오는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를 제외하면, 나머지 4편은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글이다. [[김후직]], [[거칠부]], [[백결선생]], 그리고 '''온달의 전기였다.''' 고운기 [[한양대학교]] 교수는 "이 가운데 온달전(溫達傳)은 김택영의 안목을 빛나게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12세기 우리 문화의 척도이려니와, 온달전은 [[사기(역사책)|사기]]가 자랑하는 [[백이와 숙제]]의 전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천한 백성으로 태어나, 게다가 바보 소리나 듣는 떠꺼머리가, 아름다운 훈육을 받아 성장하는 과정과, 기울어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세우려 죽기까지 각오하고,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해서는 차마 시신마저 안타까워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김부식의 마음과 김택영의 마음은 온달 속에 좋이 포개진다. 김부식이 있으므로 온달이 있고, 김택영이 있으므로 문장의 가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거꾸로 말하자면, 김택영이나 김부식 같은 이들이 온달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새삼 전해 주었다."라고 평했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0712&cid=59015&categoryId=590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