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달 (문단 편집) ===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 현 [[조령]] 인근[* 정확히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라는 고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84452&cid=43740&categoryId=44171|참조]]])'''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 아단성의 '단(旦)'과 아차성의 '차(且)'의 한자 모양이 비슷해, 두 이름이 동시에 전해진다.])'''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의 [[아차산성]]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겨우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근성의~~ 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 만약 단양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인천에서 바로 단양을 점령하고 송파구에 있는 백제왕을 압박하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송파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뒤죽박죽인 동선이 나온다. 또한 '계립현과 죽령 서쪽'이 단순히 그 인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한강]] 유역 전반'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기에 [[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1478602&dencrt=RckPhSHgIguBC2v%253%39%253%39IVBiWgJSXvjsRrbZ0VWda1mwbA%253D&term=%B0%E8%B8%B3%C7%F6&query=%EA%B3%84%EB%A6%BD%ED%98%84|참조]] 서울이 해당될 수도 있다.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그러나 [[아차산성]]의 발굴조사성과와 [[아차산 일대 보루군|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군]]의 발굴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쉽게 [[아차산]]이라는 말이 나오니 둘 다 고구려 유적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아차산성 출토 유물은 일부 백제 유물을 포함한 신라 유물 일색이었고, 아에 신라에 의해서 축조된 산성으로까지 추정되고 있다. 즉,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과 [[아신왕]]대의 기록이랑은 맞지 않다는 반증이될 수도 있...었으나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2754868|2016년에 고구려 와당이 아차산성에서 확인]]되면서 이것도 복잡해지게 되었다. [[온달산성]] 자체도 신라가 세운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게, 일단 남한강 남쪽에 있어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공격을 남쪽에서 막는 데 유리한 위치다. 그리고 구조적으로도 인근에 있는 신라가 세운 [[단양 적성비]]와 함께 축조된 [[단양 적성]], 보은 [[삼년산성]]과 거의 같은 구조, 같은 입지이다. 수구문지를 비롯하여 체성부의 외견상 구조 등 모든 것이 틀림없이 신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성 내부에서 바깥으로 배수하기 위한 시설 및 수구문지의 구조가 전형적인 신라 스타일이거니와, 성벽 전체가 신라 스타일이라 후대에 개축으로 바꾸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이 자리에 만약 원래 고구려 산성이 있었다면, 거의 성 전체를 뜯어고친 셈이다. 고구려 산성에도 배수시설은 있었을 텐데... 이처럼 복잡한 온달의 격전지에 대한 쟁점은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9&aid=0004167908|서울교대 임기환 교수의 기고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