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태호 (문단 편집) == 데뷔 과정 == 유년시절 부터 [[록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서울고등학교]] 시절 [[기타리스트]]를 꿈꾸며 [[서울고]], [[상문고]] 연합 밴드로 유명했던 '리자드'로 활약하면서, 국내 록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의 아들[* 장남 [[신대철]], 차남 [[신윤철]], 3남 [[신석철]]. 신대철과 신석철은 서울고, 신윤철은 상문고를 졸업했다.]인 [[신윤철]]과 [[그룹]] [[H2O]]의 박현준을 조우하며,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등의 다양한 음악 장르를 접하게 되면서 음악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같은 리자드의 멤버였던 신윤철, 박현준과는 무척 친한 사이여서 현재까지도 인터넷 밴드를 만들어서 석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날 정도라 하는데, 당시에 왕따 같은 것도 없이 서로를 위해주고 배려해 주면서 성장한 순수한 환경이 그가 작사, 작곡활동을 할 때 감수성 풍부한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 수 있게 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며 오태호 본인 스스로 회고하기도 했다. 1987년 이승환과 함께 [[아카시아]]라는 인디밴드로 데뷔 후에, 이듬해인 1988년 [[공중전화]]라는 소프트록 성향의 밴드에 [[기타리스트]]로 몸담았다. [[신대철]]이 주축이었던 메탈컴퍼니 소속의 대표 그룹 [[시나위(밴드)|시나위]]에서 신대철이 잠시 공석일 때 그의 기타 세션을 대리해서 담당했고, [[신대철]] 스스로도 라이벌로 생각 했을 정도로 기타 연주 실력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작곡가로 전향한 시절에도 [[이문세]] 콘서트 투어에서 기타 세션을 담당하면서 그가 작곡가가 되는데에 음악적으로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이영훈(음악가)|이영훈]]과 조우하여 호흡을 맞추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조용필]]로 부터 기타 세션 제의가 정식으로 들어오기도 했었으나 당시에 얼굴 알려지는 게 싫었던데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오태호/ohtaeho.jpg|width=80%]] 데뷔 당시만 해도 국내 [[헤비메탈]]계에서 촉망받던 [[기타리스트]] 였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발라드 작곡가로 전향한 것이 의아할 정도인데, 1980년대 당시 국내에서 기타리스트로서 몸담을 만한 음악 장르가 록, 혹은 헤비메탈 계통이 전부였기에 몸담았을 뿐 헤비메탈의 외골수적인 음악적 성향이 오태호의 둥글둥글한 개인 성격과 맞지 않았고, 때마침 [[이영훈(음악가)|이영훈]]이 만든 [[이문세]]의 [[소녀]]라는 곡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발라드 계통 작곡가로의 전향을 최종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락부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기에 전향 후에 꽤나 마음고생도 많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