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키나와/역사/선사시대 (문단 편집) === 외부와의 접촉과 기록 === 류큐 제도가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의 607년 기사에 류구(流求)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만 내용으로 보아 오키나와가 아닌 [[타이완 섬]]을 지칭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더 이전, [[한국사]]의 [[삼국시대]] [[신라]], [[가야]] 등과도 교류가 있었고 국내에서 오키나와산 문화재가 출토되어 증명이 되고 있다. [[신라]] [[경주시]]의 왕릉급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 [[천마총]]에서는 이 곳 특산인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천마총 야광조개국자]], [[황남대총 야광조개국자]] 문서 참조. 신라뿐 아니라 [[고령군]]을 중심으로 했던 [[대가야]]의 왕릉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44호분에서도 동일한 국자가 나왔다. 신라의 야광조개 국자는 야광조개의 테두리를 금동으로 둘러 장식해서 아름다움을 더했는데, 과연 금은의 나라라 할 만하다. 이 청자고둥조개(이모가이)나 야광조개국자는 4세기 류큐 원주민과의 직접 교섭에 의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일본 큐슈 세력과의 교섭 속에서 들어온 문물로 추정된다. [[김해시]]를 중심으로 했던 [[금관가야]]에서도 [[대성동 고분군]] 88호분, 91호분에서 4세기의 류큐열도산 청자고둥조개(이모가이)를 활용한 패제운주(조개껍질로 만든 말띠장식)가 출토되었다. [[금관총 이모가이 말띠꾸미개]] 문서 참조.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7세기에 액구(掖玖), 아마미(阿麻彌) 등지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 여러번 조공을 해온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아마미(阿麻彌)는 지금의 [[아마미 군도]]인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액구(掖玖)는 [[오키나와]]인지 아니면 [[야쿠시마]]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속일본기]]에서는 관리를 보내 조공관계를 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8세기 초에는 신각(信覚)과 구미(球美)의 사람들이 조정에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각은 [[이시가키 시|이시가키]] 섬, 구미는 [[쿠메 섬]]으로 추정된다. 한편 [[나라 시대]]의 승려 간진(鑑真)이 753년 항해중에 아아나파 섬(阿児奈波島)에 표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아나파는 일본식으로는 '아지나하', '아지나와' 정도로 읽을 수 있으며 [[오키나와]] 섬이었던 걸로 보인다. 8세기 일본은 견당사 파견시에 [[아마미 군도]]와 [[오키나와]] 섬을 거치는 항로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대륙이나 일본 열도 등지에서 도래인 및 선진 문물들이 들어오고, 11~12세기 경부터 오키나와에 농경문화가 정착되어 [[구스쿠 시대]]가 시작하게 된다. [[분류:선사 시대]][[분류:류큐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