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역사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성립과 [[합스부르크 제국]]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Habsburg_Monarchy_1789.svg.png|width=100%]] || || 1789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에 오르고 이어서 1452년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침내 다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100년전 선조 루돌프 4세가 위조한 Privilegium Mainus을 승인했다. 이것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은 145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되기 충분한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 되어 [[선제후]]국을 포함한 다른 공국들과는 격이 다른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고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했던 빈도 인구 이 시기에 위상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황제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분에 유럽 각지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일거에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인 딸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상속되었다. 마리는 [[프랑스 왕국]]의 압박으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저지대 지방]]을 아들 [[펠리페 1세|필리프]]가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아들 필리프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가톨릭 공동왕([[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국왕)의 계승자 [[후아나(카스티야)|후아나]]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을 획득했다. 필리프의 맏아들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영지를 모두 지배하면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제국의 수장으로 등극하였다. 자신과 아들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던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안나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 보헤미아 왕으로는 루드비크]가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없이 전사하면서 이미 1521년에 형 카를 5세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획득한 영토는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지속적으로 위협해와 1/3만 획득했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중부 유럽에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토를 확보해 나간 오스트리아는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다. 이들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 정책과 상속을 통해 이어받은 영토로 성립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군연합]] 상태로 여러 지역이 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일 뿐, 내부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국가와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느슨한 연합 체제로 이어진 것은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동맹의 역전|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이때 이 동맹국들의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자매의 패티코트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프랑스의 [[마담 드 퐁파두르]],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각각 동맹을 주도했다.]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날 만한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필사적이었던 기동 덕분에 시간을 6년이나 끄는데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전쟁을 중단했다. 때문에 전쟁에 지쳐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철수해 버렸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어쩔 수 없이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0여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본딴 개혁을 시작하며 내정에 힘썼고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서북부를 빼앗아 [[부코비나 공국]]으로 명명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을 손에 넣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