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사카부 (문단 편집) == 역사 == 17세기 도쿄에 에도 막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일본은 천황이 수도였던 나라, 교토가 중심이었고 근교도시인 오사카, 사카이를 중심으로 하여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오사카시]]는 예로부터 [[천황]]이 있는 천년 수도 [[교토시|교토]]와 가까운 점과 사카이시라는 무역학이 있었기에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항으로 성장하여 오랫동안 일본의 상업 중심지로서 기능했다. 오사카시 바로 남부에 위치한 [[사카이시(오사카부)|사카이시]] 역시 오사카, [[고베]] 등과 경쟁하던 긴키의 주요 외항이었으며 [[닌토쿠 덴노]]의 능으로 알려진 [[다이센 고분]]이 위치해 있는 등 상고~고대 시대에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다. 과거 율령국 기준으로는 셋쓰노쿠니(摂津国)의 동부, 가와치노쿠니(河内国), 이즈미노쿠니(和泉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대에는 소가씨와 대립했던 유력 호족 가문인 모노노베씨의 근거지(가와치)이기도 했으며, 헤이안 시대에는 세이와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미쓰[* 슈텐도지를 토벌한 설화로 유명한 미나모토노 라이코가 바로 이 사람이다. ]와 그 동생 요리노부가 각각 셋쓰와 가와치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는데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은 요리노부의 후손들인 가와치 겐지 출신의 인물들이다.[*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쓰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이 가와치 겐지의 일파 중 하나였던 닛타 겐지의 방계 세라다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여 정이대장군에 오르긴 했지만 이쪽은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실상 자칭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쨌든 쇼군에 취임하기 위해 세이와 겐지 중에서도 무가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가와치 겐지의 권위를 빌렸다는 점은 과거의 막부 정권들의 사례와 일맥상통한다.] 그 외에도 남북조 시대의 유명한 무장 구스노기 마사시게도 가와치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유력한 무장과의 연관이 많은 땅이었다. 무로마치 막부 이후로는 호소카와, 하타케야마의 양대 간레이 가문이 이 지역을 다스렸으나 오닌의 난을 전후해 양 가문 모두 치열한 가독 분쟁으로 인한 혼란에 휩싸였고 이 과정에서 사카이의 부유층 세력이 자치 도시를 형성하고 대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정토종의 중흥조로 알려진 렌뇨(蓮如)가 오늘날의 오사카성 일대에 이시야마 혼간지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는데 오사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렌뇨의 기록이 최초이며, 혼간지의 세력 확장과 함께 점차 오사카라는 이름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혼간지는 이후 11대 종주인 겐뇨의 대까지 이 지역에서 굳건한 세력을 보유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와 무려 '''10년간'''의 대립 끝에 결국 항복하고 이후 교토로 근거지를 옮긴다. 이는 오사카는 당시 북부는 요도가와강 동부는 히라노강, 서부는 바다, 남부는 평원이라는 '''천혜의 요새'''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천혜의 요새에 가까운 오사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고 사카이시에도 영향을 가하며 막대한 금은보화를 쌓았다. 1583년 천하인에 가까운 히데요시는 자신의 엄청난 재력을 투자해 축성한 [[오사카성]][* 현재 남은 오사카성도 크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은 이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성이었다.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성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대파하면서 현대식으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을 쌓고 이곳에 머물렀고 천하인이었기에 모든 다이묘가 상락을 하러 오면서 행정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겸하며 짧게나마 명실상부한 일본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받았던 호조 가문의 옛 영토 간토 6주와 대평야를 받은 뒤 훌륭한 치적과 내정을 바탕으로 에도(지금의 [[도쿄도|도쿄]])에 성을 짓고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승리를 끝으로 도요토미가 멸문, 도쿠가와 가가 천하를 잡게 되면서 오사카가 정치 중심지로서 누리는 영광은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에도 시대에도 오사카는 상업도시로서 일본에서 에도 다음가는 중심지였으나 에도가 번영하면서 대체로 중요성이 조금씩 준 편이다. 게다가 1869년 [[대정봉환]] 이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옮겨가 그곳이 제국의 수도로 발전하며 긴키 지역의 위상은 더욱 축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