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락실 (문단 편집) === 전성기 === 일본과 라이프 사이클은 동일하면서도 플레이 요금이 매우 쌌기에[*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한 판에 100원 정도로 정착되어 있었다. 이것도 예전에는 50원이었다.], [[대전액션게임]] 등의 오락실 플레이 빈도가 매우 높아[* 예를들어 당시 한국과 일본의 오락실 문화 차이에 대한 증언 중 하나로 "한번 붙어보고 자기보다 고수다 싶으면 일본인들은 물러나서 구경하고, 한국인들은 이길때까지 도전한다"는 말이 있었다. 한번 도전하는데 드는 요금이 10배 차이니 그럴만도 하다.] 개중엔 고수도 많이 생겨났고, PC통신 등등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배틀 팀([[클랜]], [[길드]]같은 개념)이 생기고 교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하고 붙으면 당연히 우리가 이긴다' 같은 생각을 많이들 했고 실제로도 그런 결과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KOF]]시리즈나 [[버추어 파이터]]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3TB의 걸친 시기, [[철권 시리즈]]에서는 [[철권 TT]]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앞서 있다. [[버추어 파이터]]의 경우 신의욱(aka 꼬마아키라)으로 대표되던 괴수들이 일본을 '가지고 논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 수준 차이가 심했는데 실제 플레이 영상을 뒤져보면 참 안쓰러워질 정도로 당하는 장면도 있으니… 특히 대회 이후에 신의욱은 인터뷰에서 일본의 플레이어 수준에 대해 '''일본 최고수=한국에 널려있는 동네 고수'''라고 단언하면서 대놓고 확인 사살까지했다. 대회 이전에도 인터뷰로 일본 플레이어의 수준은 낮다고 언급했지만 정작 본 영상에서 편집으로 삭제 당하기도… 그리고 결국 [[헬게이트]]를 열게되었다고 평가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렸던 세계대회에서 신의욱씨가 우승, 조학동(aka 이게라우)씨가 준우승을 석권하고 나서 일본에서 오락실 투어를 하게 된다. 결과는 일방적인 참혹한 도장깨기였고, 이런 결과를 본 [[세가]]는 두 번 다시 세계대회를 열지 않았으며 한국 선수들을 초청하지도 않았다.[* 당시 대회를 시작하기전 버파유저들은 신의욱, 조학동의 우승다툼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으며 더구나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서로 '결승에서 만나자' 라고 공언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사살.] 당시 일어났던 처참한 사건들은 자세히 보고 싶다면 [[버추어 파이터 3]] 문서에서 확인하자. 한국의 아케이드 게임은 기본적으로 최고 난이도로만 맞춰져서 유저들은 결국 실력이 높아지지 않고선 즐기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한국인 특유의 승부욕과 집중력으로 인해 생긴 폐해 아닌 폐해이기도 하다. 즐기기보단 이기기 위해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니... 물론 일본이라고 고수들이 죄다 순수하게 즐기는 인간만 있는건 절대로 아니지만. [[철권 시리즈]]의 경우 [[철권 TT]] 시절의 장익수 씨로 대표되던 시기가 유명하다. 전설이 된 것은 장익수 씨와 석동민 씨("요시오빠" 라는 닉네임으로 알려졌다.)가 일본에 초청받아 벌인 대전. 석동민 씨는 화랑 등으로 부캐릭터를 고를 때 약 8패 가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최강이라고 불리웠던 장익수씨는 일본 원정에서 단 1패도 하지 않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일본 최고수 클래스와의 100전이 넘는 대전에서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일본 철권계는 버추어 파이터 시절처럼 대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세계대회에서도 한국이 1위~3위를 모조리 석권하면서 절대적으로 앞서나갔다. 이 이후 격차는 다소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한국이 앞서 있는 편. 이후에도 [[쿠단스]], [[Nin]], [[홀맨]], [[배재민|무릎]], [[잡다캐릭]] 등 괴수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최근 세계대회 또한 한국이 석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