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대십국시대 (문단 편집) == 십국 이외의 국가 및 지방 세력 == 건국을 선언하지는 않았거나 후대에 정식 왕조로 인정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독립 세력을 유지했던 여러 [[절도사]] 세력들도 존재했다. 이런 세력들도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다 중앙 정권에 병합되었다. * '''봉상 절도사'''([[기나라|기]](岐), 901년 ~ 924년): 독립 국가를 형성하기는 했으나 십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황소의 난에 공을 세운 이무정이 관중 일대를 지배하면서 발전한 세력으로, 901년 당 소종을 자신의 근거지인 봉상으로 끌고와서 기왕의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훗날 후량을 세우게 되는 주전충과 전촉을 세우게 되는 왕건의 협공을 받아 당 소종은 주전충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무정은 서안을 점령하여 자신의 나라를 [[진나라]](秦)로 격상시키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패하고 기나라 또한 약소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후당을 세운 이존욱의 압력에 굴하여 이무정이 후당에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래도 순순히 항복해서 그런지 소원대로 진왕에 봉해졌다.] * '''노룡 절도사'''([[연(오대십국시대)|연]](燕), 911년 ~ 913년): 유연(劉燕), 걸연(桀燕)이라고도 하며, 십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본래 당의 '''하북 삼진''' 중 노룡 절도사에서 시작된 세력으로, 911년 유수광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를 연왕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913년 뒷날 후당을 세우게 된 이존욱의 공격으로 멸망당하였다. * '''성덕 절도사'''([[조나라|조]](趙), 907년 ~ 922년): '''하북 삼진'''의 유력 절도사 세력으로, 절도사 왕용은 907년 후량을 세운 주전충에 의해 조왕으로 책봉받았다. 그러나 왕용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다가 양자인 장문예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장문예는 왕씨 일가를 모두 참살한다. 장문예는 다시 절도사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장처근이 성덕 절도사의 지위를 이어받은 922년에 이존욱의 공격으로 멸망당하였다. * '''의무 절도사'''([[위나라|위]](魏), 909년 ~ 929년): '''하북 삼진'''의 유력 절도사 세력으로, 의무 절도사 왕처직이 909년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북평왕에 책봉되었다. 이후 양자인 왕도가 921년 왕위를 찬탈하였다. 929년 후당의 명종 [[이사원]]이 왕안구를 보내 북평을 쳐 근거지인 정주성을 깨뜨리자, 왕도는 가솔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하여 의무 절도사 세력은 소멸하였다. * '''무평 절도사'''([[초(오대십국시대)|초(楚)]]): 통칭 주초(周楚). 십국의 하나인 초나라의 호남성 일대에 위치한 절도사 세력으로, 초나라 멸망 이후 초의 5대 왕인 공효왕 마희악의 장수였던 주행봉이 남당 세력을 물리친 뒤 사실상의 독립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962년 주행봉 사후 세력을 이어받은 아들 주보권은 나이가 11살에 불과했고, 이 틈을 탄 휘하의 대장군 장문표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보권은 이에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송 태조 조광윤은 주보권을 돕는다는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결국 963년 무평 절도사 세력을 소멸시켰다. * '''청원 절도사''': 십국의 하나인 민나라가 남당에 멸망한 이후, 현재의 복건성 일부 지역에 잔존한 절도사 세력. 송 태종 조광의에 의해 978년 패망하였다. * '''정해 절도사''': 현재의 북베트남 일대에 해당한다. 쿡 트아 주(곡승유)가 906년 당나라에 의해 절도사로 추인되면서 형성된 세력. 쿡씨 정권은 3대까지 이어지다가 쿡 하오(곡호)에 뒤이어 쿡 트아 미(곡승미)에 이르러 930년 십국의 하나인 남한에 의해 멸망당한다. 그러나 남한의 직접 지배는 1년에 불과했고, 이후 쿡씨의 부하였던 즈엉 딘 응에(양정예)가 931년 남한의 세력을 물리친 뒤 다시 정해 절도사를 칭했다. 그러나 6년 뒤인 937년 끼에우 꽁 띠엔(교공선)이 다시 즈엉 딘 응에를 죽이고 절도사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끼에우 꽁 띠엔은 이후 즈엉 딘 응에의 사위이자 부장이었던 [[응오 꾸옌]](오권, 베트남 [[응오 왕조]]의 시조)의 공격을 받자 남한에 구원을 청했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살해당하였다. 이후 응오 꾸옌은 남한의 군대를 바익 당 강의 전투에서 크게 깨뜨린 뒤, 939년 국왕의 칭호를 사용하여 중국의 1,000년 베트남 통치를 끝내고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 '''정난 절도사'''([[서하|하(夏)]]): 현 중국 영하자치구에 위치한 절도사 세력. 이들은 탕구트족 탁발씨의 세력으로 당말오대에 중앙조정에 신종하였다가 송초 송으로부터 독립한다. [[서하]]의 전신. * '''귀의 절도사''': 오늘날의 중국 감숙성에 위치한 이른바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한 세력. 오늘날의 둔황 지역을 근거로 하였다. 그 기원은 848년 한족 계통의 [[장의조]]가 본래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토번 세력을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귀의군 절도사는 그 지리적 위치상 당시의 중국 영토와 떨어져 고립되어있었다. 심지어 서하의 전신인 정난 절도사보다도 더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육지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본래는 장의조가 돈황 일대를 비롯한 하서주랑과 하황을 수복하여 당에 바쳤지만 장의조 사후 하서주랑은 회흘에 넘어갔고 하황은 토번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송나라도 형식적으로 절도사 직함을 수여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종주권을 확인했을 뿐,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행세했다. [[파일:attachment/fiveten.png]] 지도상에서 붉은색선으로 표기된 영역으로 지리적 위치상 당시의 중국 영토와 떨어진 고립된 위치에 있었기에 형식상으로는 중국 중앙 정권에 복속된 절도사였으나 사실상의 독립 왕국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후 914년 조의금(曹議金)이 장승봉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 조씨 가문이 절도사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지리적 위치 덕에 이들은 송이 건국되고 십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하의 공격을 받고 마지막 절도사인 조현순이 서하에 항복함으로써 1035년 소멸하였다.[* 이 당시의 일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바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