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영토 == 수도는 건업(建業. 오늘날의 난징)이고, 가끔 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 제2 수도급 무창(武昌. 오늘날의 어저우시),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 도시. 그리고 오늘날의 [[대만]]과 [[하이난]] 섬도 오나라의 영역이었다. 얼핏 보면 오나라의 영토 크기가 [[위(삼국시대)|위나라]]보다도 더 크지만[* 면적으로만 따지면 [[촉한]]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실상은 좀 다르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양쯔강 남방은 밀림으로 뒤덮인 지방으로 지배 영역 중 남방의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 교주(현재 베트남 지역 )는 주변에 [[홍강]]이 있어 비옥한 곳이 많아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 다만 [[사섭]] 일가의 지배 지역인 데다 이민족 즉, 베트남인들의 땅이라] 오의 통제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그러니까 오나라는 면보다는 이런 밀림 가운데 간헐적으로 개척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였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여러 도시들과 비슷한 형태였다. 다만 오나라 영역중의 핵심인 양쯔강 하구지역 (오늘날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부근은 전국시대부터 널리 개척된 곳이었고, 후에 손에 넣은 형주도 곡창지역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오나라가 삼국정립의 한 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나라 령 영토 자체는 위촉오 중 제일 넓긴 한데 사실상 오, 건업, 장사, 양양, 무릉, 계양 이런데 말고는 별 볼일 없으며 산월쪽은 아예 허허벌판, 게다가 회계와 일남은 아예 '''최고의 유배지로 활용될 정도의 불모지'''이기마저 했다.[* 후한-삼국시대 당시 회계는 오늘날의 [[저장성]] 남부와 [[푸젠성]]인데, 저장성이야 오나라의 시대 이후 계속 [[강남(중국)|강남]]의 일부로써 번영했지만 푸젠성은 이제 막 손오 정권하에서 개발이 시작되려던 시기였다. 일남은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로 [[참파]]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홍강]] 삼각주 지역 간의 경계선이 되는데, 이 때문에 이 지역은 베트남의 독립 이후에야 베트남인들이 남하하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땅 자체는 넓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다. 정작 진짜 주요 도시들은 죄다 위나라에 몰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권]]이 그렇게나 [[허페이시|합비]]를 차지하려고 마구 발버둥을 친 것이다. 양주 지방에 해당되는 [[강남(중국)|강남]]은 이제 막 개척과 개발의 도상에 들어간 단계에 불과했으며 손권도 농업의 발전에도 신경을 쓰긴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오나라의 이런 불모지들이나 이민족의 영역을 오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더 골몰했다. 형주도 무릉 쪽은 이민족들 투성이였기에 끊임없이 확장하는 오인들과 무릉만간의 마찰이 지속적으로 있었으며, 교주 쪽도 손권 사후에는 교주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중앙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교주인들이 부딪치며 막장이 된다.[* 이때 최초로 교주를 광주와 교주로 나누어 다스리는 시도를 손오가 이룩했는데 이런 시도는 옛 월(奧) 지역이 광주([[광서성]], [[광둥성]]), 교주(북부 [[베트남]])으로 갈리는 시초가 되었다.] 실제로 오의 강역 수준은 위 지도만큼이 아니라, 동에서는 건업으로부터 서로는 이릉과 자귀에 이르는 장강 유역의 긴 띠의 형태로 보는 의견이 존재하고 양주 쪽은 장강 유역의 긴띠, 형주 쪽은 장사, 영릉, 계양 정도 까지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후한 시절 주를 따진다면 위나라는 9개 주 반[* 사례(후한의 수도), 예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량주(서량), 병주, 유주, 형주 북부], 촉한은 익주 하나뿐인데 오나라는 2개 주 반[* 형주 남부, 양주(서량이 아니라 강동 지역의 주), 교주]이었다. 그나마도 교주[* 오늘날의 [[베트남]], [[광시 좡족 자치구]], [[광둥성]] 인근.]는 13개 주 중에서 가장 후진 주인 데다가 인구도 거의 없는 수준[* 명색이 주(州)인데도 어지간한 군(郡)과 인구가 비슷했다.]이었고, 그나마 얻은 형주의 반도 전란의 중심에서 수십 년 동안 있었던지라 유표 때의 부유함은 찾기 힘들었다. 위나라도 서량 지방이나 한사군을 포함한 유주, 태원으로 대표되는 병주에 대한 지배력은 약했다고 보여지며[* 병주는 숫제 인구가 너무 적어서 병주의 속령인 현들이 계속 통폐합되는 일이 반복되기마저 했다.], 촉한도 쓰촨 지방의 장강 또는 큰 강의 이남, 윈난(남만)은 적지 않은 반란 및 이민족 거주 지역이라[* 애초에 춘추 전국시대 때는 중국의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전한 때에도 남월과 민월, 동월이라는 국가가 존속해 있었다. 이 지역이 중국의 영역 하에 편입된 건 한 무제 때의 일. (정확하게는 진나라도 점령한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붕괴되어서 다시 독립하게 된 것.)][* 제갈량의 남만정벌을 두고 봐도, 제갈량과 남만세력(맹획)은 "남만이 촉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남만인의 자치권은 인정되는 선"으로 적절히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운남이 촉한의 익주에 포함되어 있었어도, 촉한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는 곳은 아니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듯. 오나라 영역 내의 여러 이민족들도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오나라의 행정력과는 무관하게 독립상태를 이뤘을 것이다. 이들은 중화민국 때까지도 동화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현재는 이들 남방종족은 거의 동화되어 한족과 별 다를 바 없다.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한족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다), 당시 형주인 현재 후난, 후베이성에 남아있는 묘족, 투자족, 이족 등등이다. 오나라 이후 천년이 지난 명나라 시기에도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오는 한족에 대해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나라 당시에는 다루기가 더 까다로웠을 것이다. ]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달리 실 통치 영역이나 영토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더 좁다고 볼 수 있다. 후한 말 강남 지방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본격적으로 강남이 개척되어 개발되기 시작한 건 손권 치세부터이다. 그리고 손오의 발전을 토대로 [[서진]]이 캐발살나고 [[동진]]이 건국된 뒤 중원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남북조시대]](육조시대)에 강남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며, 강남이 강북을 앞지르기 시작한 건 천년 뒤인 [[남송]] 때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이 때문에 손권의 오는 중국 중세 강남의 발전을 이끈 여섯왕조를 뜻하는 [[육조시대]]의 필두에 서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