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이후 === 그러나 진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에 오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도, 강남 동요엔 "국축육(局縮肉), 수횡목(數橫目), 중국은 마땅히 패망할 것이며, 오나라가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또 "궁문의 기둥(건업궁의 기둥)이여, 결코 썩지 마십시오, 오나라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는 30년 후입니다."라고 했다. 또 "닭이 울면 날개를 치지 않으니(서로 돕지 않으니), 오나라가 돌아오는 것은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흘러퍼졌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손씨의 자손"이라고 일컬었고, 때문에 연이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횡목'의 네 글자는 오나라가 망한 후부터 원제가 흥한 지 사십 년을 가리키는 말로 진나라 원제가 강동에서 흥한 것은 모두 동요의 말과 같았다. 동진이 세워지고 진나라 원제는 마음이 약해져서, 북인을 뜻하는 '국축육(局縮肉)'인 자들은 배척했다. 이는 진서 오행지, 송서 오행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오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손씨의 후예들과 옛 오나라인들은 진나라 정권에 계속 저항했다. 이 때문에 진 무제 [[사마염]]은 '촉인들은 얌전한데 오인들은 통일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저항이 심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동진 이후로 오나라의 토착 오성 귀족들을 강남 남조 정권에서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런 민심의 여파 때문이었다.[* 화북 출신 역사가 [[손성]]이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토착 오성에 꼼짝 못하는 동진 시조 [[진원제]]와 사마씨 황실을 "동진 사마씨는 사실 사마씨가 아니라 우씨"라는 말을 처음으로 지어내 조롱했다는 설도 있다.] 통일을 완수한 서진은 통일과 거의 동시에 기강이 헤이해졌고, 20여년 후, 팔왕의 난에서 사마씨 본인들끼리 싸우며 국력을 낭비하는 한편, 매년 일어나는 홍수, 우박, 지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군 덕에 마침내 이민족에게 2명의 황제가 죽는 치욕을 겪게 된다. 또한 서진 말에는 북방 이민족과 청주에서 들고 일어난 왕미 말고도 형주, 양주 일대에서는 두도, 진민 같은 반란군이 활동했는데 이는 사마예, [[왕도(동진)|왕도]], 왕돈, [[도간]] 등의 활약으로 진압하며 진 황실은 오나라 손씨가 발전시킨 강동에 의지하여 버텨나가게 된다. 동진은 옛 오나라와 비교했을 때, [[회남]]을 소유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내려오는 유민들로 인해 군대와 인민도 그보다는 더 많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오나라 손씨정권이 낙후된 강남을 80여년간 열심히 개발했기에 동진은 그 기반 위에서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세력구도가 6:2:1로 평가되는 삼국 시대 위:오:촉한 구도와는 달리, 동진은 적어도 3 정도는 되었고 6이라 할 수 있는 화북 지역은 조씨의 위나라가 화북을 통일했을 때와 달리 [[오호십육국시대|오랫동안 통합이 어려운 상태]]였던 것도 동진 이래 남조가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어주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멸망전, version=30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