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삼국시대) (문단 편집) === 멸망[*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남부의 장군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 손오 정권을 하나로 통일해주는 것은 오랜 기간 남방을 평정하고 통치한 강력한 권위의 [[손권]]이 여러 호족, 장군간 맺은 주종관계였다. 따라서 이 주종관계에 금이 가면 이 정권에 위기가 도래할 것이었다. 때문에 오 정권에 있어서 손권의 오랜 통치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위의 경우는 이와 반대로 조비는 7년밖에 못 다스렸으며 조예는 239년에 9살짜리 입양한 아이만 남기고 죽어버려 왕조를 약하게 만들었고, 유선은 223년부터 263년까지 다스렸지만 아무도 그를 실질적인 군주라 여기지 않았다. 반대로 손권의 오랜 통치는 후계자들에게는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고 죽을 때쯤에는 [[이궁지쟁]] 같은 불행을 야기했다. 오랜 기간 황태자로 있으면서 손권 다음가는 황실 내 권위를 획득했던 [[손등(삼국지)|손등]]은 241년에 불과 30대의 나이로 죽었고, 다음으로 살아남은 연장자 [[손화]]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황태자 자리를 둘러싸고 손화파와 손패파 사이에 불화가 심하게 터지며 이 일은 250년에 손화는 폐위당하고 [[손패]]는 자살을 종용받는 것으로 끝난다. 나중에 늙은 손권은 손화를 복원시키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가장 어린 손량을 후계자로 삼도록 설득당했고, [[제갈각]]에게 보호를 맡긴다. 손권이 죽은 지 18개월 되는 253년에는 제갈각이 합비에서 처참한 실패를 한 후 [[손준]]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손량에 의해 암살당한다. 손준은 256년에 급작스레 죽었고, [[손침]]이 이 요동치는 정권을 차지한다. 손준의 옛 동맹 [[등윤]]은 손침의 집권에 반대해 쿠데타를 계획하나 실패하고 258년에는 십대 중반이 된 황제 [[손량]]이 손침을 제거하려고 하다 실패하고 폐위된다. 손량 대신 황제에 오른 것은 [[손휴]]로 손권의 6째 아들이며 당시 22살이었다. 몇 달 뒤 손휴는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손침을 제거하고 권력을 손에 잡는다. 손권의 유조를 받아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된 중신들 중에 대장군인 [[제갈각]] 등은 옛날의 태자당이었고, [[손준]] 등은 노왕당이었다. 그때까지 손오 정권이라고 하는 통일체의 중심이었던 대제 손권을 잃은 직후, 유제를 내세워 그 통일체의 중심을 또다시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 중심에 있는 중요한 중신들은 두 파로 분열된 상처를 안은 채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중신들 가운데, 손권으로부터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각은 유능한 군략가이기도 했으므로, 화북의 위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켜 일발의 대승리를 올림으로서 중앙정부의 권위를 높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권위의 확립을 초조해하여 무리하게 일으킨 대위 전쟁은 오히려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제갈각은 그래도 무리하게 북벌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원래 반대파였던 손준은 전쟁 반대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제갈각을 암살했다(253년). 그 후 256년까지는 손준이, 이어 256년부터 258년까지는 손준의 사촌동생인 [[손침]]이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초조해할 뿐 이미 권위를 확립하는 유효한 방책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저 무턱대고 권력을 휘둘러 약자를 괴롭히는 능력밖에 없었다. 포악한 손침을 주살하고 나름대로 권위를 세운 제3대 황제인 [[손휴]](258-264)는 점차 정치로부터 조금씩 도피하여 독서 학문에 심취했으나, 실제로 그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른 [[복양흥]]이나 [[장포(손오)|장포]] 같은 이들은 손휴가 죽인 손침과 비슷하게 무슨 중앙 정부의 권위를 다시 세울 만한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 손휴가 학문을 더 쌓은 이후 정치에 도피하지 않고 나섰다면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촉이 망하고 이를 근심하다가 불과 30세의 나이로 집권한 지 6년 만에 죽었다. >또 장강 해안가를 수비하는 병사들은 멀리로는 마땅히 땅을 개척하여 지역을 넓혀야 하고, 가까이로는 응당 변방을 지켜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므로, 특별히 두텁게 대우하고 양육함으로써 일에 대비해야 하므로, 특별히 두텁게 대우하고 양육함으로써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징발하고 부세를 걷는 것이 안개나 구름이 밀려와 운집해 있는 것 같아 입는 것은 짧은 갈옷도 온전하게 하지 못하며, 먹는 것은 아침 저녁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는 칼과 창이 부딪히는 어려움을 감당해야 되고, 들어와서는 의탁할 곳 없는 우수를 끌어안습니다. >---- >삼국지 오서 [[하소]]전 이어 즉위한 손호(264-280)는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기도 하고, 신하를 함부로 참살하기도 하는 등 광폭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천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군사적 활동을 진행한 중앙정부의 무리한 자세는 전쟁에 의한 쓸데없는 손해, 화려한 황실과 수도 건업의 권위를 위한 사회의 사치 풍조와 재정낭비를 초래했다. [[손호]]의 치세에 궁궐 안의 환관들은 각 주(州)와 군(郡)에 분포하여 임의로 노역을 발동하고 다투어 폭리를 구했으며 병사들이 무리한 징병과 부세에 수탈당하고 있다는 하소의 발언이 이를 증명한다. 또 손호가 중앙권력의 강화를 위해 끌어들인 세력들(환관이나 이들과 연관된 중앙조정의 관리들)의 축재를 보장하면서 이들이 각지의 부와 토지, 노동력을 수취하는 과정 역시 큰 문제가 되어 국가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한편 토착 호족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처음에 손책과 손권을 지지했던 남동쪽의 호족들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바로 이득을 봤으며 손씨 정부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 권력은 점점 막강해져 정치적으로 제거가 불가능한 수순에 이르었다. 후한 말기에 다른 곳에서도 보이듯 자발적 지원으로, 혹은 혼자서 일을 하고 세금에 바치느니 힘 있는 사람 밑에 들어가는게 낫다는 논리로, 혹은 징집되어 군대에서 활동하다 개인 사병이 되어버리며 호족들이 거느린 세력이 점점 더 막강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호족들은 중앙정부가 가진 무력과 볼모를 통해 통제가 가능했다. 볼모의 경우 중앙으로 간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기에 딱히 부담스런 일이 아니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오나라에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힘 있는 사람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신기의 보질이라는 것에서도 확인되듯 필수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얻어낸 충성심은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열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오나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호족의 불충이 아니라 호족의 협력 부족이었다. 오나라의 많은 호족들은 오나라가 어떤 정책을 취하든 간에 관심 없었다. 역사가 황실에 의해 쓰였을지라도, 상당수의 인구는 호족들에 묶여 있었다. 만약 4대 호족 중 하나로 뽑히는 위씨가 이 황실 기록에 언급이 안 될 정도로 조정과 따로 놀았다면, 조정에 영향받지 않고 따로 활동하는 작은 호족은 더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호족들은 지역 유지로 현이나 마을 하나를 다스리는 데 만족했고 수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히려 관심 꺼줘서 고맙다며 만족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서 오나라의 호족은 후한 말과 비슷하게 자신의 생존과 영향력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 하에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만을 지불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밑에서 설명하듯이 이는 오나라의 각 지방호족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개발과 발전을 이룩하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이들을 제어해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손권의 개인적 권위는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덮어주었으나 252년 그가 죽고 젊고 약한 군주들이 등극하자, 이 문제는 곧 수면 위로 떠오른다. 수도에서 일어났던 제갈각 VS 손준, 등윤 VS 손침 같은 것은 북부인에서 남부인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등애가 사마소에게 253년에 보고했듯, 이제 거대한 사병과 자산을 가진 호족들이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군주로부터 지지를 못 받는 제갈각은 곧 죽을 것이라 예견하였고 등애의 관측은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중앙 최고위직에서는 손권의 분가들이 세력을 키워나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궁전에서는 손권의 두 딸 손노반과 손노육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갈등 과정에서 군주들은 권력을 잃어나갔고, 정부의 효율은 점점 떨어졌다. 이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황실가문 내부의 계파 싸움은 중앙 정부를 점점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지역의 관심사와는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손권의 후계자들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 영주와 같은 존재가 각지에 할거하여 분열될 수밖에 없는 극히 불안정한 정국 속에 있었고, 게다가 권위의 확립을 필요로 하는 입장에 놓여진 지배자가 아무런 유효한 시책도 간구하지 못한 채였다. [[손량]], [[손준]], [[손침]], [[손휴]], [[손호]]로 대표되는 젊고 미숙한 손씨 황실의 권력자들은 무리한 권위 확립을 재촉받아 단지 권력 의지만을 맹목적, 자의적으로 발동시켰다. 손권의 죽음과 이를 이어받은 젊은 권력자들의 권위 확립 실패로 인한 중앙정치의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 촉이 무너진 전후로 오가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 무리한 군사활동을 단행했던 것은 전쟁에 의한 쓸데없는 손해를 초래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게 없었고 촉이 위에게 항복했을 때인 264년에 손휴는 죽는다. 이 위급 상황에 황제에 등극한 것이 20대 초반이던 손호로 예전 황태자였던 손화의 아들이다. 손호는 오나라에 힘을 북돋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도참을 통한 손씨 황실의 위상 강화 정도 외엔 무리한 권위 강화를 위한 국력의 소모만 일으켰을 뿐 나라를 흥성하는 진나라로부터 지키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촉이 괴멸적인 군사적 모험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어찌됐던 간에 긴 관점에서 보면 오나라는 촉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진나라에 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반적으로 손호가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 만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손호가 폭정을 펼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오래 가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주장할 때 의견 중에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도 있는데, 17년을 버티긴 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결국 오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촉한이 존속한 상황이면 몰라도 촉한이 망한 순간 이미 세력 균형은 서진으로 쏠려버렸고 게다가 오(吳)의 군사력이 감당하기엔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 촉한이 망한 순간 위진은 오나라를 공략할 고속도로를 얻었다. 가뜩이나 양번이 서진 영토라 육지로 남군과 이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파촉까지 넘어갔으니 오나라의 형주는 서쪽과 북쪽의 적을 모두 막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괜히 [[등애]]가 촉한 멸망 직후에 수년 후에 손오마저 정복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다. 이때 손오는 아직 [[손휴]] 치세였고, [[육항]], [[시적]], [[정봉]] 등 유능한 상장들이 생존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다 손휴가 죽을 것을 감안하고 저 말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손휴는 고작 30세에 들어간 젊은 황제였으며, 손호가 황제가 된 것도 손휴 사후 복양흥의 결단 때문이지 원래는 손휴의 아들이 태자로 있었다.] 다만, 등애나 왕준 모두 의견을 개진한 시점이 고령의 나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자신의 생전에 직접 천하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70세 즈음으로 추측되는 등애나 70대인 왕준이 해당 주장을 하는 시기를 넘겨버리면 군에 종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므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설득력이 높은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연하다. 종합하자면 촉을 점령함으로써 오나라는 이전보다 더 취약해졌던 상황(손휴 역시 오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죽었다)이었고, 왕준의 주장은 지금 오가 어지러울 때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면 기껏 오나라를 공격한다고 준비했던 것들이 망가지니 미룰 이유가 없다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다만 손호의 실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육항이 죽을 때 촉이 망하는 바람에 서릉(=이릉)을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면서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호는 듣지 않았고, 왕준의 계략에 넘어가 서릉 방면 담당자를 변경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오언이 왕준이 배를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고 군사 보강을 청했을 때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진서 무제기를 보면 진나라로 투항하는 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게 [[보천]]의 배신으로, 육항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신속하게 진압되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죽은 뒤였으면...] 그리고 이 중에는 종실인 손씨들도 여럿 있었다. 이는 내부 정치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것이 [[오멸망전|오나라의 멸망]]이다. 오 멸망전은 서진의 대오전선 군비확충 > 물량에 압살되기 시작 > 최전방 관리자들 패사 > 정예 총동원해 벌인 대회전 패배 > 대세가 기울자 투항 & 귀부 & 도주 > 새수 반납 등 침략전 성공의 정석을 밟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시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오나라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두예의 파죽지세로만 기억되는 오나라의 멸망전이지만 사마주가 오군 5~6만명을 전투 끝에 참수하거나 항복시켰다는 기록,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가 이끄는 3만명이 불리한 상황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 일부 진군의 항복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패했다는 기록, 장강 중류의 핵심 방어거점인 강릉의 군대가 두예에게 저항하다가 격파되었다는 기록, 곽마의 난으로 수만 명의 군대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러 가서 병력이 분산되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오군은 각지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열세를 뒤엎진 못했다. 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형([[육안(손오)|육안]], [[육경]])을 잃었으며 본인도 포로 신세가 된 [[육기]]는 오멸망전을 두고 자신의 저서 변망론에서 '손호 치세 초기엔 자신의 아버지 [[육항]]을 비롯한 뛰어난 신하들이 보좌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죽고 이들의 공백을 미처 채우지 못했던 시기에 진이 쳐들어와 오가 망한 것이지 촉이 망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오나라에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위기를 막아낼 능력이 있는 장군들과 신하들이 존재했었고 오가 망하는 그때는 마침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기는 아버지 육항의 시대와 오멸망전을 동시에 겪은 세대인 만큼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오나라의 지휘관들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입장이라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오멸망전 시기에 동오는 이전까지 동오 최고의 명장들이었던 육항, 시적, 정봉에 버금가는 인재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서진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인데, 서진의 명장 [[양호(삼국지)|양호]] 또한 육항이 살아 있을 시절에는 공격할 생각을 접고 대치하는 것으로 응하다 육항이 죽고 나서야 동오 정벌을 주장했다.] 역시 오나라의 장수였던 [[오언]] 역시 '손호는 영명한 군주였고 뛰어난 신하들이 그를 도왔으나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는 실패했을 뿐'이라고 사마염 앞에서 술회한 것을 보면 당대 오의 패장들 입장에선 불과 몇년 전 선대에 비해 오가 멸망할 당시엔 좋은 장수가 많이 없었고, 열심히 싸웠지만 상황이 중과부적이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나라의 관료들은 대부분 항복하여 진나라의 관리를 지냈고, 손호의 폭정으로 쫓겨나거나 실망해 물러났던 이들은 양주자사 [[주준(서진)|주준]]을 통해 등용되었으며, [[석위]], [[제갈정]], [[범평]], [[진훈]]처럼 오나라에 충성하여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282년에 오나라의 옛 장수였던 [[완공]]과 [[백봉]]이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공격하고 양주를 포위했는데, 진나라의 서주자사인 [[혜희]]에게 토벌되어 오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본 삼국지]]와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따르면 오는 멸망 직전 비축된 곡식이 280만 섬, 배가 5,000여 척, 후궁이 5,000여 명 정도 됐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