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옌시산 (문단 편집) === [[국공내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7년의 옌시산.jpg|width=100%]]}}}|| || 1947년의 옌시산 || --더러워 보이던 인상이 급격히 부드러워졌다--[* 취소선이 쳐지긴 했지만 옛날 사진에 비하면 안경을 쓴 당시의 모습이 온화해 보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맨얼굴이었던 20~30년대에는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으나 40년대 중후반 안경을 착용한 모습은 온화하고 너그러워 보이는 중년의 인상으로 탈바꿈했다.] 일본군이 항복하자 옌시산이 몰입했던 일은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타이위안을 비롯한 산시 북부의 탈환이었다. 옌시산은 휘하의 19군을 동원, 타이위안을 탈환했고 필사적으로 일본군을 포섭하였다.[* 아첨, 체면치레, 뇌물, 여자 등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총동원하였다.] 그는 일본군, 괴뢰군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으나, 남은 일본군 잔당들은 그에게 꼭 필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옌시산은 일본군 부대를 무장해제한 후 미국 등의 기자에게 쌓여있는 무기 사진을 찍게 한 후 그 무기들을 다시 일본군에게 돌려주어 무장시킨 채 이들을 '철도 수리 노동자'들로 둔갑시켜 공산당 전선으로 보내었다. 또한 옌시산은 산업단지 등에 일본인을 고용함으로써 부족했던 관리직 기술직 인력을 보충했다. 옌시산이 일본군을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은 일본군은 타이위안으로 몰려들었고, 이후 옌시산이 지휘하는 일본인 부대는 총 15,000명이었다. 이 수치는 미국의 일본인 송환 프로젝트 후 10,000명으로,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에는 3,000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중일전쟁 기간 동안 세력을 확장한 [[중국공산당]]은 옌시산이 손쉽게 산서에서의 패권을 되찾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옌시산 휘하 4개 사단 1만 7천명은 산시 성 동남부인 샹당지구(현재 [[창즈]]시의 일부이다)를 재점령하려 했는데, 이곳은 공교롭게도 중일전쟁 이래 공산당 휘하 [[팔로군]]이 장악중이었다. 팔로군은 옌시산의 군대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충돌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회담하던 기간이었기 때문에, 중공측은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강대강으로 나갔고 결국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양측이 동원한 정규군의 수는 비슷했으나 (옌시산군 3만 7천, 팔로군 3만명), 팔로군은 중일전쟁 당시 조직화한 민병 5만명을 추가로 동원했고, 수적으로 우세한 공산군의 공세에 19군은 참패했다. 옌시산은 19군에게 항전을 명령하였고, 23군과 83군도 급파했으나, 두 세배의 병력을 가진 공산군에게 포위되었고, 19군도 포위섬멸당했다. 옌시산은 3개 군 11개 사단을 잃었으며, 이때 3천 명이 전사했고 3만 명 이상의 포로를 내었다. 이때 옌시산이 잃은 병력은 자군의 1/3에 달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일단 옌시산의 패전 때문에 충칭에서의 협상은 공산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10월 10일 국공양당이 합의한 쌍십협정이 나오자, 중일전쟁 이전이 아니라 현재의 점령지를 기준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옌시산은 중일전쟁 이전의 자신의 영역을 되찾는 것을 실패했다. 사실 쌍십협정은 사실상 국공양당의 시간벌기용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일본군이 물러나 공백이 영역을 재빨리 선점하기 위해 국공 양당은 일단 휴전에 합의했지만, 양쪽 모두 이것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쌍십협정 이후에도 계속 산발적인 군사충돌이 벌어지다가 1946년 결국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다시 발발한다. 그래도 화북에서 [[푸쭤이]] 등이 어느 정도 버티면서 한동안은 타이위안을 중심으로 한 정권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요심 전역, 회해 전역에서 국민정부군이 섬멸되고 국민정부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옌시산의 오랜 산시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만주에서 공산당에게 참패 당한 국민당은 화북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공산당의 화북병단은 산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옌시산은 국민당이 무너지기 전까지 [[웨이리황]], [[후쭝난]] 등과 함께 산시의 공산당을 토벌하고, 1947년 옌안을 점령하는 등 잠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룽전이 지휘하는 화북야전군 1병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의 세상도 끝장났다. [[배수진|옌시산은 산시에서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다른 군벌들이 맥없이 무너진 것과 달리 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저항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5일 샤오디엔 전투에서 2개 사단을 잃었으며 타이위안이 포위되었다. 옌시산은 일본군들까지 모조리 동원하고, 후쭝난이 보낸 지원병력을 투입하여 싸웠으나, 결국 홍군을 격퇴하는 데 실패했다. 옌시산은 [[아크튜러스 멩스크|타이위안을 잃을 바엔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며, 타이위안 곳곳에 가솔린과 폭약을 설치했고, 자신도 자결하기 위해 독약을 준비했다. 공산군도 옌시산이 조밀하게 요새화한 타이위안을 뚫진 못했고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49년 공항 앞의 옌시산.jpg|width=100%]]}}}|| || 1949년 타이위안을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배웅받는 옌시산(오른쪽)[* 왼쪽은 양화지(梁化之), 중앙은 옌시산의 사촌동생 엄혜경(阎慧卿)이다.] || 하지만 [[푸쭤이]]가 수비하던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면서 옌시산을 제외한 장강 이북의 모든 국민당군이 완전히 무너지자, 옌시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옌시산은 난징으로 가 총통 대행 [[리쭝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 때는 이미 국민당군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당장 수도인 난징이 풍전등화였기에 리쭝런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이 무렵 공산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옌시산은 다시는 산시를 밟아보지 못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 지하조직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후쭝난]]이 보내주는 공수로 연명하여 악착같이 버텼지만 대세를 돌이킬 순 없었다. 결국 1949년 4월 24일, 산시는 함락되었고 옌시산의 왕국은 사라졌다.[* 홍군에게 붙잡힌 왕징궈와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포로가 되어서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각각 1952년, 1955년 전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 산시성 주석 량화지(梁化之)와 일본인 지휘관 이마무라 호사쿠는 자살했으며 3만 명의 수비대도 전멸했다.] 한편 난징도 4월 23일 함락되었고 옌시산은 광저우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에 합류했다. [[탕성즈]]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난을 공산군에 바치자, 허잉친은 자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배반 당하거나 자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사임했다. 리쭝런은 후임 [[행정원장]]에 자신의 입맞에 맞는 인물을 세우려 했으나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장제스는 옌시산을 지지했고, 그 결과로 옌시산은 허잉친의 뒤를 이어 제4대 행정원장 겸 제5대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붕괴 직전의 국민정부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제스와 리쭝런의 고래싸움 사이에서 눈치보는 일 밖에 없었다. 그는 중재자로 둘을 화해시켜 보려고 했었으나,[* 한 번은 리쭝런에게 사임하지 말라고 설득하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산시성을 잃은 것을 예로 들며 둘이 어서 화해하지 않으면 국민정부의 대의를 잃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효과는 미미했다. 이 와중에 10월에 광저우가 함락되고 11월에 충칭으로 이전했는데 12월 1일에 충칭도 함락되고 호남과 광서도 넘어가는 난장판 속에서 [[국부천대]]를 결정,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물론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11월에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여 장제스가 다시 총통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그래봐야 10월 1일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기껏 섬 몇개와 국경지대 오지만 남은 상황이긴 했지만....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옌시산의 도장1.jpg|width=100%]]}}}|| || 타이위안을 점령한 공산군이 노획한 옌시산의 도장[*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