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형 (문단 편집) == 정사 == 예형의 이야기는 [[후한서]] 예형열전, [[정사 삼국지]] [[순욱]]전의 주석에 적혀있다. 재능이 뛰어나 중원에 이름을 알렸다. 공융의 말에 따르면 예형은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한 번 보거나 들으면 외워버리고, 생각하는게 귀신 같고, 암산 능력이 한무제 때 유명했던 홍양에 뒤지지 않았다. 예형은 너무나 오만하였고 독설이 심해 남의 의중과 시선을 개의치 않아 하였으며,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는 말을 나누려고 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싫어했다. 예형 본인도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융]], [[양수(삼국지)|양수]]와 친분이 있었다. 특히 공융과는 서로를 높게 평가했다. 정사에 공융을 큰 아이라고 부르고, 양수를 작은 아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나오는데 '兒' 자는 젊은, 어린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이니 연배가 있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다. 더구나 공융은 본인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데도... 그나마 본인이 인정하고 높게 평가하는 공융, 양수에게조차 이러한 낱말을 선택할 정도였으니 예형의 성향을 잘 시사한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순욱]]과 [[조융]]이 당대를 대표할 만하냐고 묻자, 예형이 답하기를, 순욱은 그의 얼굴을 빌려 초상집에 조문하게 할 만하고 조융은 주방을 감독하게 하며 손님을 맞이하게 할 만하다고 말했다. 순욱은 그저 얼굴만 잘 생겼고 조융은 대식가인 게 다라고 놀린 것이다.[* 배송지는 주석에서 순욱 본전에는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만 전략, 예형전, 순욱의 비문에 뛰어난 용모에 관한 언급이 있다고 말했다.] 이 평을 듣고 사람들이 예형을 더 싫어했다. 건안 연간 초[* 196~220년이다.] 예형은 허도에서 자신을 채용해줄 사람을 찾아 명패을 품고 다녔지만 명패의 글자가 닳을 때까지 채용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당시 임용을 담당하던 [[진군]], [[사마랑]]을 찾아가라고 하자 예형은 나보고 백정들이랑 어울리라는 말이냐라고 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공융이 여러 번 예형의 재주를 칭찬하자 궁금해진 [[조조]]가 예형을 만나보고자 했다. 조조가 사악하다고 생각했던 예형은 자신이 미치광이병이 있다는 핑계로 조조를 만나지 않았다. 조조는 화가 났지만 예형의 재주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인망을 잃을까봐 죽이지는 못했다. 조조는 예형을 놀릴 마음으로 북을 치는 고사(鼓史) 직책을 주어 예형이 음악에도 기량이 뛰어난지 시험해 보겠다고 했다. 예형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 때 예형의 연주곡이 어양참과로, 예형이 만든 어양참과가 후대에 전해졌다.] 행사를 담당한 관리가 예형의 복식을 가지고 혼을 내었다. 그러자 예형은 그 자리에서 옷을 홀라당 벗은 뒤 복장을 바꾸어 입고 다시 북을 쳤다. 이에 조조는 "내가 예형을 욕보이고자 마련한 자리인데 오히려 욕을 본 사람은 나로군!"이라고 했다. 나중에 공융이 조조에게 가 예형이 미치광이라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대신 사죄했다.[* 라곤 하지만 사실 이 미친놈을 조조에게 소개한놈이 공융 본인이다, 일각에선 공융이 노골적인 목적을 띄고 예형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조를 괴롭힐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있을 지경이니.] 이후에도 예형의 특이한 행동을 견디기 어렵자 조조는 유표가 예형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자며 예형을 유표에게 보낸다. 예형은 유표에게 항복을 권하라는 임무를 받고 형주로 떠나게 되었다. 정사 삼국지 주석에서는 사람들이 예형을 싫어했기 때문에 여행의 안녕을 비는 의식에서 일어나지 않고 미리 짠 대로 계속 앉아있었다. 후한서에서는 화가 난 조조가 부하들에게 예형을 전송할 때 일어나지 말라고 미리 명령하였다. 지나가던 예형이 느닷없이 대성통곡을 하였다. 사람들이 왜 우냐고 묻자 예형이 대답했다. "시체더미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데 왜 슬프지 않겠소." [[강하팔준]]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던 [[유표]]는 호승심이 들어 자신의 재주를 예형과 비교하기 위해 밤낮으로 토론을 벌였으나, 예형의 학식이 높음을 깨끗이 인정했다. 예형은 유표의 글을 잠깐 훑어보고 찢은 뒤 다시 그대로 적는 가공할 만한 기억력을 선보였다. 이후 유표는 예형의 글을 소중히 보관할 만큼 예형을 높이 평가했으나, 예형은 그의 성격대로 유표에게 여러 차례 모욕을 주었다.[* 장소전에서 등장하는 내용을 보면 유표가 [[손책]]에게 보내려고 직접 글을 쓴 뒤 예형에게 보여주었더니, 예형은 '이 정도 글은 손씨의 어린아이들에게나 보여줄 만한데 [[장소(삼국지)|장소]]에게 보여주려 하시다니 말이 됩니까?'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유표는 더 이상 못 견디고 예형을 [[황조#s-3]]에게 보냈다. 황조는 예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예형을 아꼈다. 황조의 아들 [[황역#s-1]]은 아버지보다도 더 예형을 좋아했다. 예형과 황역이 놀러갔다가 채옹의 비문을 본 일이 있었다. 황역이 이것을 베껴오지 못해 아쉽다고 하자 예형이 한 번 본 비문을 그대로 적어주었다. 손님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예형이 황조를 모욕하자 화가 난 황조가 예형을 죽였다. 그의 나이 고작 26세였다. 황조는 곧 후회하고 예형의 대표작인 앵무부(鸚鵡賦)라는 시를 따라 예형을 앵무호라는 호수에 떠있는 앵무주라는 작은 삼각지에 후히 장사지냈다. 예형의 묘는 세월이 흐르며 지형이 바뀌어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지만, 도시 외곽으로 이장되어 아직도 문화 사적지로 유지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