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지황후 (문단 편집) == 업적 == 단순히 황후에 머물지 않고 여러가지 업적을 세웠으며, 특히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던 아들을 매우 엄격하게 키워 [[성종(요)|요성종]]을 요나라 최고의 [[명군]]으로 성장시킨 바람직한 어머니 상으로 자주 회자된다. 명신 [[야율융운|한덕양]]을 등용하여 성종 때부터 [[도종(요)|도종]] 때까지 3대에 이르는 요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했으며, 또한 거란인과 한족의 차별을 없애 서로 공평하게 대우를 받도록 했다. '''몸소 전장에 나가 [[북송]]과 맞서 싸웠다.''' [[태종(송)|송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나라로 쳐들어 오자 태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송군을 패퇴시킨 것. 1004년에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송을 공격했다. 그런데 요나라 장군 소달람이 송군의 화살을 맞고 죽자 요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처음부터 요와 싸우기 싫은 주화파였던 [[진종(송)|송진종]]은 주전파 재상 [[구준(북송)|구준]]의 반대를 꺾고 사신을 보내 요와 화친을 청했다. 소태후는 이를 놓치지 않고 양국이 형제 관계를 맺고 휴전에 응하여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백은 10만냥을 요나라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는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어 요의 국익을 극대화했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가 승천태후를 사실상 황제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여요전쟁|거란의 침입]] 이후에도 요가 계속 [[강동6주]]를 침범하자 문종 9년 7월 도병마사에서 문종에게 "'''전태후황제'''가 조서로 압록강 동쪽을 고려의 땅으로 인정하였는데 요가 자꾸 침입합니다"라고 보고를 올렸다. 이때 고려가 언급한 전 태후황제는 당시 요의 섭정을 맡았던 승천태후였다. 전태후와 황제를 나눠서 해석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나눠 해석해야 한다면 상식적으로 전태후황제가 아니라 황제전태후가 더 적합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