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문단 편집) ==== 구약 성경의 예형론 ==== 흔히 예수가 구약의 율법을 폐지하였다고 표현되지만, 이 표현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예수 자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절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가 보는 구약의 율법은, 예수가 폐지한 것이 아니라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같은 원리로, 신약은 구약을 폐지하지 않는다. >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 >루가 24장 25-27절, 44-46절(공동번역) 오히려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지, 폐기되고 사라져야 할 무언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바탕으로서 이스라엘의 성경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고 그분을 통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역사{{{-2 役事}}}에 관한 소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거듭 책―이스라엘의 성경―을 자구대로 인용하거나 관련 제재{{{-2 題材}}}들을 들여온다. '율법과 예언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 증언을 해석하고 정당화해 주는 지평이다. …… 교회가 이스라엘 성경을 자기 성경의 첫째 부분으로 삼은 것은 강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성경의 문서들은 이론의 여지 없는 계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은 자신들의 예수 선포에 범주적 전달 가능성, 설득력,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 문서들을 되잡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2 (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 >-Erich Zenger 씀,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22-23쪽[* 볼드체는 책에서 강조된 것.] 물론 구약 율법 전체를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자구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구약을 어떻게 수용하여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율법을 '시효가 지난' 텍스트로 보는 것은 신약 성경 본문의 자기 이해에도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약이 구약을 부정한다고 오독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독법이다.[* 일찍이 마르치온 같은 경우 "구약 폐지하고 신약으로만 가시죠?"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교회에 수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상술했다시피 구약에서는 예수와 관련하여 예형론적으로 읽는다. 이를테면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보자. || [[가톨릭|{{{#000 가톨릭}}}]] 성경 || [[개신교|{{{#000 개신교}}}]] 개역개정 ||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개역한글판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가 앞에 붙지만 개역개정판에선 생략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3>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 왼쪽은 [[가톨릭]] 성경, 오른쪽은 [[개신교]] 개역개정 성경.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 보니, 번역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맛깔나는 번역을 한다. 굳이 양쪽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 이 구절은 이른바 '[[야훼]]의 종'으로 불리는 이에 대한 구절로, 타인의 악행과 죄악을 짊어지고는 재판을 통하여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 종은 초월자에게 벌받은 자로 여겨지며,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다. 예수는 바로 이 '야훼의 종'의 행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하였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주장하였다.[* 루가 22장 37절 참고. 단 주의를 주자면, 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을 반드시 예수로 해석해야'만' 그리스도교 신학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로마 15장 21절에서는 이사야 52장 15절을 사도 바울로에게 적용되는데, 이를 통해 신약 성경이 이 구절을 예수에게'만' 적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이 '야훼의 종'을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교식 해석법도 그리스도교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자 '예수의 신부{{{-2 新婦}}}'이며{{{-2 (묵시 21,2)}}}, 때로는 예수와 동일시된다.{{{-2 (사도 9,4-5)}}}] 또한 예수는 나자렛에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 [[루가의 복음서]] 4장 18-19절 라며 이사야 61장 1-2절을 칠십인역에 따라 자유롭게 인용하여,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는 그리스도(메시아)임을 강조했다.[* 칠십인역의 이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다음과 같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그 밖에도 자신이 [[요나]]의 기적을[* 예언자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나왔고, 이후에 이민족인 아시리아에 [[유대교]] 신앙이 전파된다. 이에 대비되어 예수는 죽은 지 셋째 날에 부활하고, 이후에 민족 신앙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진다. 여기서 눈썰미가 빠른 사람은,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이었고 "예수는 셋째 날에" [[부활]]이므로 날짜가 하루 차이 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시대에 따른 어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복음서는 이 어휘 변화의 과도기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루가의 복음서]]에는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로 표현되고, 루카의 복음서에는 '사흗날에'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은 모두 예수가 금요일에 사망하여 주일(일요일)에 부활했음을 고백한다.]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오병이어의 기적|빵으로 장정 5천 명 이상을 먹인 기적]]에서는 [[출애굽기]]의 만나 및 [[예언자]] [[엘리사]]의 기적을 자신에게 연관시킨다. 또한 [[신명기]]에는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있다. >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 [[신명기]] 18장 15절 그런데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수명을 마치고 난 후, 후일담 격으로 나오는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이 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 >― 신명기 34장 10절 즉 [[모세]]는 하느님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보내줄 것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였는데, 정작 [[신명기]]의 저자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시대까지 [[모세]]급 예언자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되는) 매우 특별하고 각별한 관계를 이루며, 자신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며, 자신이 아버지와 어떤 동일함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이라는 [[모세]]급 예언자의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는 예언자임을 표현한다. 그 밖에도, 예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이 구약에 예고되어 있고, 복선이 뿌려져 있는 자라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그렇기에 구약을 예수에 대한 복선과 떡밥을 찾으며 읽는 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권장하는 독서법이다. 주의를 주자면, 그렇다고 해서 구약 본문의 1차적인 의미를 등한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교황청 성서 위원회(위원장: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uments/rc_con_cfaith_doc_20020212_popolo-ebraico_fr.html|《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씀.[* 번역은 [[도미니코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138쪽에서 인용.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_index.ht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