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문단 편집) === 결혼 여부 ===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12절 >예수는 미혼자로 살았다. 자기 가정 이루기를, 아내와 자녀 두기를 포기했다. 당대 유다교계에서는 이런 처신이 한심한 충격적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는 것이 거의 의무적인 계명으로 여겨졌다. 근거는 [[창세기]] 1,28이었다: "자식 낳고 번성하라." 랍비들의 유교계에서는 독신자란 혈통을 망각하는 자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미혼자를 랍비로 서품하기를 피했다. 쿰란에만 독신으로 사는 [[수도자|수도승]]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마태오 19,12에 어느 모로 보나 예수의 독신과 관련되는 로기온이 전승되어 있다. 백성 앞의 혼인교시와 연결지어 예수는 독신의 가능성에 관해 제자들을 가르친다: "사실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에 의해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분류법에 따라 구성된 이 말씀은 ― 고자가 되는 세 가지 경우를 꼽는데 ― 두 가지 점에서는 날카로움을 띤다. 우선 한 가지는 고자라는 멸시적 개념, 혼인할 수 없도록 거세됨을 가리키는 개념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거세는 신명 23,2 이하; 레위 22,24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는 흉측한 짓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말씀에 따르는 결론인즉 가치전환이라는 점이다. 처음 두 경우에는 외적인 불운으로 말미암아 신체적인 생산불능이라는 한스런 상태에 이르게 된 그런 일을 말하는데, 셋째 부분에서는 고자가 자의로 받아들인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런데 욕설 같은 인상을 주는 고자라는 개념이 그냥 남아 있고 보면, 이 대목이 예수를 향한 공격과 관계가 있다는 추정은 적확하다. 예수는 미혼자로 살기 때문에 적수들한테 고자라는 욕설을 들었으니,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하고 어울려 먹는 바람에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방을 덮어쓴 것과 한가지다.{{{-2 (마태 11,19//)}}}.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34-235쪽 예수는 총각으로 살았고 아내와 자녀가 없었으며, 적대자들에게 [[고자]]라는 욕설을 들으며 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딱히 예수가 결혼 여부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가 유부남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했다는 설, 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 본인의 [[결혼식]]이라는 설, 예수의 자손이 [[프랑스인]]의 시조라는 설 등이 있다. 3번째의 경우 예수는 사위에게 나라 하나를 만들어주고 그 나라의 초대 황제를 시켰는데, 그 나라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이며 오늘날의 프랑스의 근본이라는 주장. 특히 [[댄 브라운]]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을 써서 대중에게 엄청 유명하게 알려지는 바람에 신학자들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골머리를 썩인 적이 있다. 심지어 고대의 [[파피루스]] 기록인 마냥 누가 위조하여 ‘예수에게는 아내가 있다’는 식의 글을 만들어 학자들조차 속아 넘어간 적도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01&sid1=104&aid=0007739822&mid=shm&cid=428291&mode=LSD&nh=20150719113023|#]] 본 문서에서 결혼 여부가 문단이 따로 생길 정도로 길어진 것도 그 영향이 있다고 할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가 예수의 결혼식이라는 주장은 사실 성경을 잘 읽기만 해도 쉽게 논박할 수 있는 상당히 허술한 주장. "예수도 그의 [[12사도|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나, "[[성모 마리아|여인]]이시여,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와 같이 해당 혼인잔치가 본인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또 예수가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된다. 예수의 후손이 메로빙거 왕조까지 이어졌다면 그 사이 시간이 400여 년이나 되어서, 30년마다 한 세대라고 치면 최소 13세대가 넘으니 방계 후손이 엄청나게 많아야하는데, 다른 예수의 후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심지어 가난한 노동자인 예수가 어떻게 사위에게 나라를 세우게 시킬 수 있고, 당시 이미 로마의 확고한 영토였던 [[프랑스]]에 어떻게 나라를 세우라 시킬 수 있었겠는가. 예수가 결혼했다는 주장에서 단골로 나오는 설명이 '당시 랍비는 결혼을 해야만 인정을 받았는데 예수도 랍비라고 불렸다'는 설명인데, 이는 랍비란 단어를 오독한 것이다. 랍비라는 단어는 1세기 당시에는 '나의 주인', 의역해서 '스승님', '나리', '어르신' 정도의 의미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라삐라는 호칭이 '선생님' 혹은 '스승님'이라는 호칭 대신 모두 네 번 사용된다{{{-2 (마르 9,5; 10,51; 11,21; 14,45)}}}. 하지만 이런 사실만으로는 이 호칭이 예수의 가르침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싸잡아 말할 수는 없다. ... 전체적으로 보이 예수를 '선생님'{{{-2 (스승님)}}} 혹은 '라삐'라 부른 것을 근거로 그분께서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신 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시 '별생각 없이 통용되던 관용어'[* (책 속 주석)F. HAHN, ''Christologische Hoheitstitel: Ihre Geschichte im Frühen Christentum'', FRLANT 83 (Göttingen 1963[math({/}^{4})]1974) 77.]였다. >----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김병학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8), 55쪽. >당시에는 아직 랍비라는 호칭이 서품된 율사에 대한 존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한정된 사용은 1세기 말경에 비로소 관행이 되었고, 따라서 랍비라는 호칭에서 예수가 한때 어느 랍비 문하에 입학한 일이 있었다는 결론마저 끌어내어서는 안된다.[* (책 속 주석)한 랍비계 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여호수아 벤 페라햐의 제자였다고 하는데, 전혀 근거가 없다. 이미 年代상 이유로도 지탱될 수 없다. 예수를 얀나이 왕 때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이 전승에 관한 비판은 이미 Klausner, ''Jesus'' 25-9에도 나온다. 요한 7,15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예수가 공부한 적이 없다는 비난을 한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정한교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2002), 223쪽 또 혈연을 매우 중시했던 유대인들의 관념상 예수에게 아내나 자녀가 있었으면 그들이 성경이나 서간 등에 언급되어야 하고,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 하지만 초대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였고,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형제(혹은 사촌 형제)인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맡았다.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맡은 건 예수와 그나마 가까운 혈연 덕이었을 것이다. 즉 예수는 독신을 평생 유지했을 것이다. 예수 결혼설에 대한 반박은 바트 어만[* 저자의 국내 번역 출판물로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예수 왜곡의 역사>, <성경 왜곡의 역사> 등이 시리즈로 출판된 바 있다.] 저서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에서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다빈치 코드]] 문서에서도 일부 다루고 있다. 여담으로 예수는 정욕을 갖고 여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바오로]]는 서간을 보면 간음은 당연히 죄고, 정 성욕을 못 참겠으면 결혼을 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하되, 그것도 순결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서는 차선책으로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임신]]은 창조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산모와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지만, [[성행위]] 자체는 쾌락을 목적으로 하면 안 된다며 매우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 또한 고대와 중세 그리스도교인 [[가톨릭]]은 [[수음]]도 죄악으로 봤고,[* 이는 현대 [[가톨릭]]에서도 그대로다.]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소위 '성 혁명'이 일어날 때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억압적으로 만든 주요 원인을 종교에 돌렸다. 21세기인 지금도 그리스도교는 서양,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막론하고 성에 대해 보수적인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일반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는 복음서에서 결혼하지 않았다. [[사제]]와 [[수도자]] 모두 예수의 본을 받아 평생 독신을 지키는 것이다.[* [[가톨릭]]과 달리 [[정교회]]에서는 [[기혼자]]도 사제가 될 수 있고 [[성공회]]에서는 사제가 된 이후에도 결혼할 수 있다. 또한 가톨릭에서도 동방 예법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에서는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기혼자를 사제로 서품할 수 있다. 하지만 [[수도자]]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모두 독신으로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한다.] 심지어 수도자가 없고 목회자가 독신을 지키지 않는 개신교에서도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아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 표현되고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교회)'라고 표현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예수 스스로가 부부나 혼인과 연관된 가르침을 매우 중요시했으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위치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였다. 이는 삼위일체론,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일부일처제]],[* 예수에게 다른 아내가 없고 에클레시아(교회)에게 다른 남편이 없듯이, 지상 인간의 [[부부]] 생활도 그래야 한다는 것.] 혼인 불가해성 교리와[* [[가톨릭]]이 특히 강조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이혼]]에 부정적이다. [[혼인성사]] 참조.] 큰 연관을 가지고 있다. >마태 9,14~15과 그 병행구 그리고 마태 22,11~14; 25,6; 요한 3,29에서 신랑은 예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이사 54,5~6에 등장한다.[* (책 속 주석)참조: 호세 1~3장; 이사 62,5; 에제 26장 그리고 시편 45에 관한 타르굼의 독서는 이 시편을 하느님과 그의 신부인 시나고구에 적용시키고 있다.] >---- >-샤를르 페로,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신부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34-3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병행구: 마르 2,19-20; 루카 5,34-35] >----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병행구: 루카 14,15-24] >----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25,1) >----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7-2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