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문단 편집) == 예수 이후 == [include(틀:토론 합의, this=문단, 토론주소1=StraightRoomyMightyCopper#450, 합의사항1=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하지 않기)] * [[네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열심당]](젤롯, 혁명당)에서 일으킨 [[유대]] 전쟁은 1세기경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한 [[티투스]]는 서기 70년,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 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대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다 같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성전이 허물어질 것이라는 예수의 생전 예언이 실현된 셈이었다. 로마 군대는 조롱하듯이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통곡의 벽]]이다.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70년부터 1948년까지 나라 없는 백성이 된다. 이것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몇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일으킨 유대인 반란(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 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만 추방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이 완전히 쫓겨나진 않았다. 때문에 [[십자군 전쟁|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의 예루살렘 함락 때도 이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공존하던 토착 유대인계 시민들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시오니즘]] 운동 당시에도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방으로 이주한 유대계 [[유럽|유럽인]]이 예루살렘시에 여전히 거주하던 [[아랍인]] [[유대교|유대교도]]를 만난 기록도 있는 등, 이스라엘 내부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꽤 적지 않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 현대 [[이스라엘]]이 건국한 이후, 예수에 대한 재판이 불법적이며 무효라고 인정해 달라는 청원장이 이스라엘 법원에 접수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법원은 이 골 때리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는 [[로마 제국]] 법에 따라 처벌받았으므로 로마 제국의 후계인 [[이탈리아]] 법정에 가서 소송하라'는 답변을 보냈다. 하지만 현대 법치 제도에서 고소자([[유대인]])가 아니라 판결자(로마 제국 법원)만이 피고(예수)의 명예 회복을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당연히 [[바티칸]]이 있는 이탈리아에선 진즉에 무고함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 제국 속주들의 모습을 보면, 산헤드린에서의 판결이 사실상 확정적인 판결이라 볼 수 있다. 속주 유력자들이 내린 의견이기 때문에 보통 로마 제국 [[총독]]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게 보통인데, 잘 받아들이지 않아서 속주에서 분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책임은 총독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다 받아들여 주었다. 로마 제국은 분명 속주에 대해 우위에 있지만, 속주 총독은 현지 유력자들을 무시할 수 없단 이야기. [[복음서]]에도 바라바 대신 예수를 처형하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민란]]이 날까 봐 무서워서 들어주었다는 말이 있다. *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로마 전역에서는 [[12사도|제자들]] 및 [[사도 바오로]]의 행보에 의한 [[선교]]가 이루어졌으며[*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결합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수백 년 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기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유럽]] 전역에 걸쳐서 공통된 서양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한 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칙령 이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양의 철학이나 문화, 역사에 [[그리스도교]]가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예시1 "어떠한 사법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종교적 연원에 대한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종교의 영향이 깊고도 지속적이었기 때문이다. 서구 세계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장 오랜 기간 종교법 체계를 운용해 왔으며, 현대 사법 체계에 미친 영향도 확연하다. 서양 사법 제도의 기본적 기관, 개념, 가치는 11, 12세기의 종교 의례, 예배,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죽음, 죄와 벌, 용서와 구원에 대한 태도를 비롯하여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레이먼드 웍스{{{-2 Raymond Wacks}}}, 『법』)][*예시2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잉글랜드]], [[독일]]을 막론하고 도시사의 주요 문헌에서는 시대를 코뮌 이전 시기와 코뮌 시기로 구분한다. 즉 도시 공동체(Stadtgemeinde)의 형성을 시대 구분의 결정적인 전기로 간주한다. 시기적으로나 발전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나, 위에 언급한 지역들에서 도시와 시민을 둘러싼 기본적인 공통 토대가 존재했다고 전제되며, 그것들을 결합시켜 주는 요소가 중세 성기(盛期)의 코뮌 형성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대변하는 학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졌고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 막스 베버(Max Webver)이다. 그는 심지어 __코뮌 운동의 전개에서 유럽의 발전을 결정짓는 혁명적 변혁을 포착했으며, 그 변혁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서양의 사회 체제, 문화, 사고방식의 발전은 없었으리라고 단언했다.__ 역사적으로 다른 많은 국가들과 시대에도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던 대도시들은 있었으나, 코뮌과 같은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하며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던 시민의 존재는 중부와 서부 유럽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크누트 슐츠 지음, 박흥식 옮김, 『중세 유럽의 코뮌 운동과 시민의 형성』 21쪽)]([[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511352&memberNo=1464463&vType=VERTICAL|왜 지금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그리스도교가 세계에 널리 전파된 이유는 단지 서구 세력의 발전과 개척의 역사 때문일 뿐”이라면서 “그리스도교 교리 자체는 다른 종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열고, 서양의 근대가 나오는데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양]]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된 것도 맞지만, 그리스도교가 서양의 발전에 힘을 보탠 것도 사실이다. 당장에 [[유럽]]에서는 교회의 어마어마한 기록을 통해 900년 전 [[고딕]] [[성당]]의 설계도를 찾거나, [[프랑스]] 남부의 한 [[농노]]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 [[대항해시대]]에 그리스도교가 영향을 준 부분은 [[선교]]에 있다. 미지의 땅의 발견은 서양의 교회와 권력 기관으로 하여금 산업 자원의 확보와 더불어 '''원주민에 대한 적극적인 그리스도교 전파'''라는 명분을 주었고, 이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군대 파견 및 현지 산업 시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영향만은 아니다. 지리적인 부분 및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반발로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 결과가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에 걸친 그리스도교화. * 현대 문명의 철학적인 기반이 되는 [[천부인권]]의 근본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한 조물주'가 [[그리스도교|어느 종교]]의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서구의 천부인권적 개념이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근대에 등장한 천부인권(자연권)의 개념은 자연법사상에서 제시한 인권을 뜻하는데, 서구의 자연법사상의 근저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들과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있다. [[창세기]] 1장에서 인간이 유일신의 모양과 형상을 좇아, 영을 공급받은 유일한 피조물로서 모든 창조의 마지막에 창조된 것을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이러한 인간 중심적 견해가 극단적으로 나간 데에도 그리스도교가 근저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기계적 자연관은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를 낳았으며, 불신자에 대한 종교 전파 와중에 은연한 선민사상이 스며들어 [[백인의 의무]]류의 발상이 등장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의 public theologist들 사이에서도 생태주의와 인권 운동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가 주된 관심거리이도 하다.] *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여기에 맞선 [[가톨릭]] 쇄신은 둘 다 '예수로부터 배운 원래의 신앙'을 기준으로 하였다. '개혁(reform)'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진보'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마르틴 루터]]이든 [[장 칼뱅]]이든 [[트리엔트 공의회]]이든 간에 논쟁의 대상은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이지 예수가 가르친 적이 없는 무언가로의 이탈이 아니었고, 바라본 것은 과거이지 미래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루터도 칼뱅도 의도하지 않은 '근대'라는 사생아를 낳았으나, [[계몽주의]]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들은 그 시대 유럽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고, [[르네 데카르트|데카르트]]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 [[쇠렌 키르케고르|키르케고르]] 같은 당대 유명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유신론자들이었으며, 버클리는 아예 [[성공회]] [[주교]]였다.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동안이나 유럽인 대다수에게 예수는 규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