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방전쟁 (문단 편집) === 실제 === 예방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쟁이 임박하지 않았음에도 미래의 잠재적인 위협을 예방하기 위한 전쟁이다보니 [[선제공격]]과 달리 정당성이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핵개발을 막기 위해 벌인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과, 시리아가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폭격한 [[과수원 작전]]은 예방전쟁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중국의 경우 [[6.25 전쟁]] 때 개입과 [[중월전쟁]]의 개입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식의 [[순망치한]]의 논리를 적용했었다. 특히 중국의 예방전쟁에서 가장 최고의 성과라고 말한다면 6.25 전쟁의 개입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자국의 최고 핵심 전략종심이자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의 국가위협과 안보적 안위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두개의 국가를 유지함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입장을 강요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동시에 오늘날 북한이라는 존재가 대미전선에서 미국을 상대로 완충지대의 역할과 동시에 러시아의 남진견제에도 효용성을 갖출 수 있었다.[* 이는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북한이 소련에게 한 정치 행보로도 확인된다. 물론 당시 중국을 상대로도 비슷한 짓을 해서 욕을 먹긴 했다.] 동시에 한국에게는 자신들의 정치적 우위를 강요할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국으로서는 매우 장기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중월전쟁 때의 경우 6.25 전쟁보다 실망스런 결과를 냈으나 베트남의 팽창을 저지함으로서 남중국지역의 자국의 영향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반도의 내륙지역의 국가들을 친중 국가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지금도 캄보디아-라오스는 친중 성향이 매우 강하다.] 중국의 두 경우의 예방전쟁의 결과론적인 성공사례도 중요한 예방전쟁의 사례가 된다. [[일본]]에서는 [[운요호 사건]]부터 [[한일합방조약|식민지화]]에 이르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예방전쟁처럼 보기도 한다. 한반도가 적대세력에 넘어가면 일본의 안보가 위험해지니 조선에 개입한다는 의미이다.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받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의 이론적인 체계로 이를 정당화했다. 또 [[진주만 공습]]도 예방전쟁으로 보는데, 어차피 미국과 언젠가 전쟁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이왕 전쟁을 한다면 미국의 태평양 전력을 기습으로 궤멸시켜버려서 미국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어버리려고 했었다. 러시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우크라이나 침공]]을 예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러시아어 교육을 폐지하는 등 러시아계를 핍박하고, 나토에 가입하여 러시아를 위협하려 한다는 명분이었다.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유명한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미어샤이머 교수도 이를 예방전쟁 성격으로 보고있다. >전쟁의 기원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푸틴이 더 큰 러시아를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에 따라 2022년 2월 24일에 도발적인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푸틴이 정복하고 합병하려는 첫 번째 국가였지만 마지막 국가는 아니었다고 떠든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으며 실제로 이 주장과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상당한 증거가 있었다.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우크라를 서구권의 보루로 만들려는 서구 국가들(특히 미국)의 결정이었다. 이 전략의 핵심 요소는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는데 푸틴뿐만 아니라 러시아 외교정책 전문가들 대다수가 친미 우크라 정부는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정책 입안자들과 전략가들이 처음부터 나토의 동유럽 확장을 반대했던 이유는 러시아가 나토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결국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자 명단에는 조지 케넌, 윌리엄 페리 합참의장, 존 샬리카쉬빌리 장군, 폴 니체,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리처드 파이프, 잭 매트록 등이 포함된다. 2008년 4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모두 조지 부시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가입 의견에 반대했다. 메르켈 총리는 나중에 푸틴이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말했다. 물론 나토 확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옳았지만, 그들은 전투에서 패했고 나토는 동쪽으로 진군했고 결국 러시아가 예방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2008년 4월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려고 움직이지 않았거나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발한 후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기꺼이 수용했다면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우크라이나 국경은 1991년 독립했을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어샤이머 The Darkness Ahead: Where The Ukraine War Is Headed 2023.6.24.> 한국사에서는 고구려의 [[여수전쟁]], [[여당전쟁]] 사례에서 요서 공격과 요서 지역에서의 군사적 활동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 경우는 예방전쟁보다는 선제공격의 사례로 더 크게 활용되는 경우가 크다.] 그전에도 [[북제]]에 대한 거란을 활용하여 공격해본 사례가 있으며 [[발해]]도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한 사례가 여기에 해당된다. [[신라]] 때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쓰시마 섬]]으로의 예방전쟁 이야기가 기록에서만 두 번 나왔는데[* [[유례 이사금]], [[실성 마립간]]] 두 번 다 대신들의 반대로 중단했다. 고려때 [[흥료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거란을 공격한 사례도 대표적 케이스이다. 후에 [[고려]]와 [[조선]]이 실시했던 [[여진정벌]]과 [[대마도 정벌]]도 예방전쟁이다. 반대로 [[조선]]이 대상이었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예방전쟁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영원성 전투]] 이후 [[원숭환]]이 지키는 북방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명-후금간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였는데, 명나라와 청나라(당시 후금)간 어느정도 중립을 지키려 하던 [[광해군]]이 축출되고 친명배금을 기치로 하는 [[인조]] 및 서인 세력이 집권하자 [[숭덕제|홍타이지]]는 향후 명나라와 전쟁 시 조선의 적극적인 배후 공격/명과의 협공을 우려해 광해군 폐위를 명분삼아 조선 침공을 감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