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니체리 (문단 편집) == 기타 == 특이하게도 부대 용어가 주방 관련이다. 부대원 하나하나는 [[숟가락]](Kaşık), 부대장의 호칭의 뜻이 [[수프]] [[요리사]]라는 뜻의 초르바즈(Çorbacı)이고, [[소대]] 깃발은 '''거대한 솥'''이다. '''[[한솥밥|같은 솥에 음식을 끓여 먹는 동지들]]'''(=[[식구]])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즉, '''[[전우|함께 먹고, 자고, 싸고, 죽는 동지들]]'''이라는 뜻.[* 참고로 고대 [[스파르타]]에서도 '''피디티온'''이라고 해서, 같이 식사하고 같이 싸우는 공동체가 있었다.] 그리고 술탄이 예니체리 전용으로 내려주는 식사를 거부하면 그것이 항명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를 "[[밥상 뒤집기|솥을 엎는다]]."라고 말했다. 현대 [[터키어]]로도 관용구로 살아남아서 "OO가 솥을 뒤집었다."(OO kazan kaldırdı)라고 하면 "OO가 반발했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니체리들은 울루페(ulûfe)라고 불리는 매 3달마다 한 번씩 나오는 봉급을 받았는데, 이 월급날과 [[라마단]]달 15일에는 술탄으로부터 [[튀르키예 요리#s-3.10|바클라와]]를 하사받았다. 바클라와는 [[톱카프 궁전]]의 부엌에서 만들어서 배포되었는데, 먼저 예니체리 총사령관이 두 쟁반을 들고 그 뒤로 분대별로 두 사람이 나와 한 쟁반씩 들고 막사까지 이동했다. 이때 바클라와 쟁반을 들고 가는 병사들은 초록색으로 칠한 나뭇가지에 쟁반을 끼워서 거리를 행진했는데, 이것이 [[이스탄불]] 시민들의 볼거리가 되었다. 이른바 바클라와 행진(Baklava Alayı)이라고 하는 행사인데, 예니체리가 해산되기 바로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행렬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예니체리가 해산되던 해 라마단 15일에 있던 바클라와 행진에서 한 난쟁이 노인이 손자를 데리고 이 행렬을 구경하다가 실수로 예니체리 병사들과 부딪혔고, 병사들이 거칠게 그를 밀치자 "이 신성한 달에 기도는커녕 이딴 행진이나 볼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이냐! 알라여, 저 망할 놈의 행진을 다시는 볼 수 없게 하소서."라고 저주를 했고, 그 때문인지 바로 그 해에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예니체리는 이슬람 신자임에도 다른 신자와는 달리 콧수염을 제외한 수염을 기르는 것을 금지했다. 또 결혼도 못 했다. 높은 직위에 오른 뒤에 퇴직하면 결혼도 할 수 있으며 퇴직금도 상당히 받았다.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후기에는 이런 금지조항들이 다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화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하나 있으니... '''예니체리들이 믿었던 종단은 제도권 수니 이슬람과는 거리가 먼 [[알레비파]] 계열의 벡타쉬파였다.''' 벡타쉬파는 시아 계열의 신비주의 종파로, 이들이 교조로 모시는 하즈 벡타쉬(Hacı Bektaş)부터가 "경전이나 십자가가 아닌 인간에게서 구원을 찾으라." 라고 말하는 등 인본주의적인 종단이었으며, 모든 종교에 관대했기 때문에 기존에 기독교인들의 성인들이나 성지를 마찬가지로 존중하고 순례까지 했다. 오늘날 튀르키예인들에게 남아있는 성인 공경의 풍습 같은 것들이 바로 벡타쉬파의 흔적이다.[* 현대 튀르키예인들에게 성인 공경의 풍습이 남아있는 또다른 이유로는 [[정교회]]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키예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언어로만 구별이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구별조차 힘들 만큼 혈통적, 문화적으로 섞여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별개의 나라로 갈라진 현재까지도 두 나라에 서로의 문화적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라마단]] 금기 같은 것도 대놓고 무시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는 등 기존 이슬람과는 거리가 조금 있기 때문에 이맘들은 예니체리들을 영 탐탁치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이단자라며 혐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시기 박해받은 알레비파와는 달리 벡타쉬파는 오스만 제국에 협조적인 입장이었고,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부터가 일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종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명색이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라는 [[칼리파]]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셀림 2세]]나 [[무라트 4세]]처럼 거리낌없이 술을 마셔댄 군주가 의외로 많으며 최후의 칼리파인 압뒬메지트 2세는 심지어 직업화가 수준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사실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오스만이 쇠락하여 이슬람이라는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생겨나기 전까지 칼리프는 오스만 황제가 보유한 여러 칭호들 가운데 하나로만 인식되었을 뿐 특별히 중시되지는 않았다.]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들은 45cm의 매우 길고 술이 많이 달린 접힌 뵈르크라는 모자를 쓰는데, 어느 술탄이 자신의 옷에서 잘라 하사한 소매를 모자로 쓴 것이 그 시초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머리도 꼭대기 한뭉치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깎아버리는 헤어스타일을 하는데, 전장에서 [[전사]]해 목이 잘릴 때 잡고 치켜올리라고 남겨둔 손잡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정예병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자신들과 똑같은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도 더 성적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 카프쿨루 [[시파히]]를 싫어했다고 한다. 예니체리가 마피아 비슷하게 세력을 확장하다가 티마를르 시파히의 영지를 잠식하자 티마를르 [[시파히]]와도 사이가 나빠졌다. 이래서인지 예니체리가 횡포를 부리던 시절에도 시파히는 술탄에게 충성해서 '기병들은 반역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겼을 지경이며, 예니체리 해산 때도 시파히가 활약했다고 한다. 시파히도 이후에 해산당했으나, 예니체리와는 달리 과정 자체는 꽤 온건해서 티마를르는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은퇴하게 하고 카프쿨루는 새로 개편한 서구식 기병부대에 편입하는 형태로 소멸했다. 오스만 제국의 숙적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도 예니체리가 있었다. 17세기 중반 무렵 폴란드의 슐라흐타(귀족)들이 포로로 잡힌 예니체리들에게 '''"너네 노예로 팔려갈래? 아니면 내 부하 할래?"''' 하면서 이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한게 시초다. 이들은 폴란드 예니체리(polish janissary)라고 하였으며 당시 슐라흐타들 사이에선 이들을 데리고 다니는게 잠시 유행하기도 했었다. 왕도 예외는 아니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최후의 먼치킨 얀 소비에스키도 [[제2차 빈 공방전]]에 참전했을 때 사로잡은 예니체리들로 부대를 만들어서 다녔다. 다만 직접 전투에 투입되거나 하진 않았고 그냥 슐라흐타의 위엄을 돋보이게 해주는 이국적인 '''퍼레이드용 부대'''로 [[의장대]]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튀르크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원년 멤버들은 전부 늙어서 사망하고 나중에는 그냥 폴란드인들이 예니체리 복장 입고 [[코스프레]] 하는 부대가 됐다.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 오스만 제국에게 크게 데였던 동유럽 일부 국가에선 '예니체리'라는 단어가 '''[[배신]][[레니게이드|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던 [[세르비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로 세르비아인들에게 횡포를 부렸던 예니체리들에 대한 반감으로 그들을 실컷 혼내주거나 물리치는 민담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세르비아에서 영웅시되는 실존인물 [[마르코 크랄리예비치]] 왕자(1335~1395)는 현실에서는 오스만에게 패배하고 물러나서 그다지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민담에서는 그야말로 300살은 살았다느니 아주 전설로 내려지며 온갖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오스만에게 패배하고 반란에 시달려 고생하다가 죽은 현실과 달리 전설에서는 예니체리들을 그야말로 파리떼 수준으로 통쾌하게 박살낸다(...)[[http://todayhumor.com/?mystery_9259|마르코 왕자의 전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