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영화 (문단 편집) === 시작과 발전 === * 세계 최초의 상업 영화 출현 말 그대로 '돈을 받고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로서 최초의 '상업' 영화라는 뜻. 엄밀히 말하면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단편 영화 모음집이다. 독일의 스클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만든 '''비오스코프'''로 만든 영화가 대중에게 상영한 날짜는 뤼미에르 형제보다 58일 앞선다. 그러나 큰 인기를 끌지못해 세계최초라는 명예는 얻지 못했다. 목록은 [[http://en.wikipedia.org/wiki/Auguste_and_Louis_Lumi%C3%A8re|위키피디아 참조]]. 《[[열차의 도착]]》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이는 [[1896년]] [[1월 25일]] 상영되었다. * 세계 최초의 극영화 원래 영화는 단순히 사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2-1908년까지 에드윈 포터나 [[조르주 멜리에스]]를 시작으로 스토리가 담긴 영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고정카메라로 녹화하여 스토리가 있는 영상은 제법 있었지만 조르주나 에드윈은 영상의 [[편집]]기법이라는 영화만이 가능한 기법을 발명해 영화를 단순히 녹화를 넘어서 하나의 예술장르로 정착시킨다. 에드윈 포터는 노동자 출신으로, 영화는 물론 기초적인 예술교육도 받지 못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오히려 그가 극영화를 발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Virginia Wexman,'세상의 모든 영화',김영선 역,이론과실천,2008,p29] 우연히 토마스 에디슨이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해 기회를 받은 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조르주 멜리아스의 《[[달 세계 여행]]》이 최초의 극영화라고 흔히 알고들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조르주 멜리에스]]는 내러티브를 포함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다만 《[[달 세계 여행]]》이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하므로 생긴 착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극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물 뿌리는 정원사>이다. * [[무성영화]]의 출현 처음의 무성영화는 중간 중간에 간극을 넣고 [[자막]]을 사용했다. 이후 [[변사]]를 활용하거나 녹음한 음원을 같이 재생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장벽(을 일부나마)을 뛰어넘는다. * 한국의 영화 도입 [[개화기]] 시절 [[사진]]과 함께 도입되었다. 당시에는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해서 [[활동사진]]으로 불렸으며 들어온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항공기 기내 영화 등장 항공산업이 점차 발달, 일반화되면서 여러가지 서비스가 추가되기 시작했는데, [[http://www.airtravelinfo.kr/xe/54361|1925년 영국 임피리얼 항공사(Imperial Airways)가 사상 처음으로 항공기 안에서 비행 중에 영화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 상영됐던 영화가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로 이 역시 무성영화이며, 영상 외에 자막과 배경음악으로 구성되었다. * [[라디오]]의 출현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화면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무성영화는 계속 살아남았다. * 유성영화의 출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Vitaphone (1).jpg|width=400]]}}} || || 워너 브라더스 비타폰 로고 || 사실 영화 극초기부터 유성영화는 존재했다. 바로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축음기를 합친 키네토폰이다. 그 이후에도 유성영화를 위해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싱크 문제와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증폭 문제는 [[1906년]]에 오디온 튜브의 개발로 해결되고, [[1919년]]에 독일에서 Tri-Ergon이라는 방식이 발명된다. 소리 신호를 빛 신호로 바꾸어 필름 구석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싱크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다. [[1927년]],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 제작사였던 비타그래프 스튜디오를 합병하여 비타폰이라는 사운드 시스템을 개발해[* 이 시스템은 고전 [[루니 툰]] 단편에서 1960년대까지 사용된다.] 최초의 유성 극영화 《[[재즈 싱어]]》를 제작한다.《재즈 싱어》는 그 해 35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유성영화의 신호탄을 울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할리우드 관계자는 유성영화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초기 유성영화는 음향의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이 별로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더라도 소리가 왜곡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즈 싱어》가 개봉하고 2년 만인 [[1929년]]에 제작된 영화의 75%가 유성영화로 제작되면서 무성영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무성영화를 고집하던 대표적인 스타로는 [[찰리 채플린]]을 꼽을 수 있다(단 채플린은 유성영화를 만들어서 살아남았다).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작품에서 이 당시 무성영화 배우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슈퍼스타들은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실제로는 [[목소리]]가 생긴 것과 안 어울린다거나, [[발음]]을 제대로 못 한다거나, [[사투리]]를 쓴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무성영화 시대에는 말 안하고 연기만 하면 됐으므로 적당히 연기만 잘하면 대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의 등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열리자 당시 배우계에는 [[헬게이트]]가 열렸고,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투박하거나 경박한 [[목소리]]를 지녔던 배우들은 제 아무리 슈퍼스타라 할 지라도 첫 유성영화 데뷔에서 수많은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들며 대망신을 당하게 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성공적으로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배우들이 유명인 무명인 가릴 것 없이 몰락해 갔다. 주로 억양이 센 [[북유럽]] 계열이 많이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