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프독 (문단 편집) === 근현대 === [[프랑스 혁명]]에 따른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형성 역시 영프독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한 요소였다. 프랑스의 구체제 탈피에 따라 이를 반대하는 복고 세력이 반불동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독일은 근대 독일의 주축이 된 [[프로이센]]이 [[권위주의]]적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영불과는 다른 독자노선(Sonderweg)을[* 번역어는 '특수한 길', '특수노선' 등 여러 개로 분화되어있다. '존더베크'라고 그냥 음차해서 적기도 한다.[[https://ko.wikipedia.org/wiki/%EC%A1%B4%EB%8D%94%EB%B2%A0%ED%81%AC|#]]] 걸으며 갈등을 겪었다. '[[제3의 위치]]'를 표방한 [[파시즘]] [[나치 독일]]은 독자노선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 패망의 여파로 [[독일 분할|독일이 분할]]되고 독일이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면서 서독 역시 서방 세계의 확고한 일원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서독의 입장 전환에는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공이 크다고 여겨진다. [[냉전]]은 영프독을 우호적인 국가 공동체로 만든 결정적인 시기이다.[* 본래 외부의 거대한 위협이 나타나면 그보다 작은 세력들은 뭉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베네룩스]] 3국이나 [[발트 3국]]은 이웃나라들이 거대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끼리는 크게 대립하지 않는다.] [[2차 대전]]의 피해로 인하여 이들 국가는 [[식민제국]]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국제정세는 [[미국]]과 [[소련]]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되었다. [[소련]]의 위협 앞에서 영프독은 서로 갈등하기보다는 군사동맹 [[NATO]]의 일익으로 서로 협력해야 할 것이 요구되었다. EEC와 같은 경제 공동체, 더 나아가 [[유럽연합]]이라는 국가연합이 탄생하면서 영토나 자원 때문에 갈등을 빚을 일도 줄어들었다. 단, 그 사이에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드골 재임 당시인 1960년대 프랑스는 양차대전을 겪으며 오랜 우방 관계로 발전한 영국의 EEC 가입에 반대했다. 이는 프랑스 중심의 유럽 통합을 꿈꾼 드골 입장에서 미국의 혈맹인 영국의 영입은 프랑스나 서유럽이 아닌 미국 중심의 유럽 질서 개편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으며 또한 드골 스스로가 영국은 친유럽보다 친[[영연방]] 스탠스가 크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이 안정화된 후에도 [[유럽 난민 사태]], [[유로화]], 대중 전선 등에서 영국과 프랑스 및 독일은 마찰을 빚어왔고 이는 결국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영국은 유럽의 진정한 통합에 있어 프랑스나 독일보다 열정이 덜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때 세계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대영제국]]의 종주국 영국 입장에서 유럽의 일개 소국들과 같은 권리를 누리는 회원국1이 되는 것에 대한 심리적 반발감이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러시아 제재 강도에 대한 이견이 나타나기도 했다. 러시아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강경 대응 위주였던 반면 독일은 [[노르드스트림]]관과 다수의 [[러시아계 독일인]] 등의 문제로 온건한 편이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아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침략을 감행]]하면서 대러 제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