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평군(1828) (문단 편집) == 후손 == '''입양 릴레이''' 첫 부인 [[평산 신씨]]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했고, 재혼한 [[청도 김씨]]와의 사이에서는 [[딸]] 한 명을 낳았다. 딸은 [[왕실]] 작위를 받지 못했으며, 군수(郡守) 창원 황씨 황연수(黃演秀)와 혼인했고 1918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양자(가족)|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1864년(고종 1년) 9월에 [[선조(조선)|선조]]의 서9남 [[경창군]]의 9대손 이신휘(李愼徽)[* 1868년 이휘응(李徽應)으로 [[개명]]한다.]의 아들 [[청안군(1851)|이순달(李順達)]]을 [[입양]]했다.[* 영평군과 실제 혈통으로는 21촌이다.(...)] 이순달은 이재순(李載純)으로 개명했고 1899년([[광무]] 3년)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 자격으로 청안군(淸安君)으로 봉해졌다. 청안군은 1904년([[광무]] 8년)에 사망했는데 그도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의 아들 [[풍선군|풍선군 이한용]][* 1907년([[융희]] 원년) 풍선군(豊善君)으로 추증.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18촌(...), [[청안군(1851)|청안군]]과는 23촌(...)이다.]을 입양했지만 그 역시 후사없이 1890년(고종 27년) 16세로 사망했다.(...)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에 풍선군의 [[양자(가족)|양자]]로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을 [[입적]]시켰다.[*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청풍군(1890)|이해승]]은 원래 [[덕흥대원군]]의 후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월산대군]]의 후손'''으로(...), 이해승의 친할아버지 이재숙이 덕흥대원군 후손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면서 그의 본가가 덕흥대원군파로 편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평군과 실제 혈통 상으로 '''31촌(...)''', [[청안군(1851)|청안군]]과는 '''32촌(...)''', [[풍선군]]과는 '''33촌(...)'''이다. ] 그래서 [[영평군(1828)|영평군]] - [[청안군(1851)|청안군]] - [[풍선군]] - [[청풍군(1890)|청풍군]]까지는 전부 [[입양]][[관계]]인 셈. '''영평군은 살아서 양[[증손]]까지 본 것이다.''' 참고로 저 때 영평군이 이해승을 입양할 것을 [[고종(대한제국)|고종]]에게 직접 청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4_09A_28A_00120|#]] >숭릉 영 이건용의 아들 이인봉을 이한용의 후사로 세우게 할 것을 청하는 영평군 이경응의 상소 > >영평군(永平君) 이경응(李景應)이 상소하기를, > >“삼가 아룁니다. [[명성황후|대행 황후]]의 탄신일이 또 지나갔고 별전(別奠)도 지냈으니, [[고종(대한제국)|성상]]의 슬픔과 [[순종(대한제국)|황태자 전하]]의 그리움은 새삼 더욱 크실 것이고 신민들의 원통함은 갈수록 깊어집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신의 나이는 지금 70으로서 아침저녁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몹시 급박한 개인 사정이 있기에 사랑으로 덮어 길러 주시는 성상께 머리를 들고 울면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아들 [[청안군(1851)|이재순(李載純)]]은 슬하의 자식이 일찍 죽어서 50이 다 되었으나 달리 대를 이을 자식이 없습니다. 매번 [[누동궁|가묘(家廟)]]의 제사를 맡길 사람이 없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신은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침식(寢食)조차 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 >삼가 생각건대, 대가 끊어지게 된 집안에 [[양자(가족)|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하는 것은 국법(國法)에도 허락하고 있습니다. 신의 집안의 사판(祠版)이 사체(事體)가 각별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에 감히 황송함을 무릅쓰고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족손(族孫)인 숭릉 영(崇陵令) 이건용(李建鎔)의 아들 [[청풍군(1890)|이인봉(李麟鳳, 이해승의 아명)]]을 신의 죽은 손자 [[풍선군|이한용(李漢鎔)]]의 후사로 세우게 해 주소서. 간절히 바랍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경의 집안에 후사를 세우는 것은 사체가 각별하니, [[장례원]]으로 하여금 예사(禮斜)를 발급하도록 하겠다. 경은 그리 알라.’는 내용으로 비서원 낭을 보내어 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28일(갑인, 양력 10월 23일) 자 기사[[http://sjw.history.go.kr/id/SJW-K34090280-01000|#]] [[청풍군(1890)|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친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4명을 두었지만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일제강점기|일제 치하]] 1943년에 [[참척|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 때 [[실종|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회장. 즉 영평군의 후손들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각주] [[분류:대한제국의 황자군]] [[분류:대한제국의 황족]] [[분류:누동궁 종주]] [[분류:서출]] [[분류:강화군 출신 인물]] [[분류:1828년 출생]] [[분류:1902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