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지주의/기독교 (문단 편집) == 발렌티누스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 == 발렌티누스는 '모든 [[영지주의]] 이단의 아버지'이다. 발렌티누스 이전에는 교리적으로 체계화된 영지주의 교파가 없었고[* 2세기 경 마르시온이 후대의 영지주의와 일부 통하는 주장을 하기는 했다.], 거의 대부분의 영지주의는 발렌티누스의 학설을 인용하거나 혹은 발렌티누스파에서 갈라져 나오는 등으로 생겨났기에 사실상 발렌티누스가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발렌티누스는 2세기 로마에서 활약한 영지주의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였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주로 [[이레네오]]의「이단반론」에 간략하게 언급된 내용 외에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가르치기도 하다가, 성 [[히지노]] 교황(136~140년 재위) 때 로마에 와서 로마 교회 안에서 활약하였다. 발렌티누스는 재능과 언변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황]]직을 기대하였지만, 박해에서 살아난 다른 사람이 교황직에 오르자[* 교황 성 [[비오 1세]](140~155년 재위)를 일컬음.] 이에 격분하여 [[보편교회]]를 떠났다. 그 후 그는 성 [[아니체토]] 교황(155~166년 재위) 때에 로마를 떠나 동방으로 갔다가 말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160년 무렵에 사망하였다. 발렌티누스는 서간과 강론과 시들을 썼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스트로마타」에 몇 가지 단편들만 전해오고 있으며, 대부분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는 「진리의 복음(Evangelium Veritatis)」[* 이 저서는 이레네오가 '발렌티누스파는 <진리의 복음서>란 것을 사용한다'라고 서술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는 알려졌으나, 이레네오는 저서에서 진리의 복음의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았으며, 문저 자체도 상실되었다. 1945년 12월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진리의 복음서>로 추정되는 사본이 발견되어 본문 전체가 출판되었다. J. C. Shelton, Nag Hammadi Codices. Greek and Coptic Papyri from the Catronnage of the Covers, Leiden 1981. 그러나 이레네오가 진리의 복음을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그함마디에서 나온 사본이 정말로 이레네오가 말한 그 <진리의 복음>이 맞는지 확언할 수는 없고, 학자에 따라서는 그 사본을 <진리의 복음>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을 썼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영지주의적 바탕 위에 그가 만들어낸 복음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영지주의의 기초가 되는 '아이온'설이 아직 나와있지 않을 정도로 창설 초기의 작품이다. 발렌티누스가 만든 사상은 로마에서 급속도로 파급되었을 뿐 아니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급격히 발전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프롤레마이오스와 헤라클라온이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활약한 '서방계 발렌티누스파'와 바르데사네스와 악시오니코스가 중심이 되어 동방으로 번져나간 '동방계 발렌티누스파'이다.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심하게 변형되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발렌티누스 자신의 학설이고, 어디까지가 그의 제자들이 변형한 것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발렌티누스 영지주의의 동방계파와 서방계파 사이의 세부적인 사항들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골격은 같다. 한편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누스의 학설이 '어떤 옛 학설의 씨'에서 온 것이라 하는데, 여기서 '옛 학설'은 영지주의를 말한다. 따라서 발렌티누스는 영지주의의 토대 위에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