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제(후한) (문단 편집) === 환관과 척신이 설치고 난세가 시작되다 === 이런 폐정의 결과 184년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같은 해에 서량에서는 [[변장(삼국지)|변장]], [[한수(삼국지)|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186년에는 흑산적이 하북을 휩쓸었으며, 187년에는 장거, 장순의 난이 일어나는 등 하나같이 10만 이상의 초대형 반란들이 각지에서 잇다른다. 마침 185년에는 [[초신성]]이 나타났는데,[*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초신성이다.] 《후한서》 <천문지>에는 "점을 쳐 보자, 병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했다.[[https://bookedit.tistory.com/10|#]] 이에 앞선 178년에 영제는 황후였던 송씨를 내치고 송씨 일족을 숙청, 배후 세력이 없던 천민 출신의 하씨([[영사황후 하씨|영사황후]])를 새 황후로 세웠다. 하씨의 오빠인 [[하진(삼국지)|하진]]은 하남윤으로 승진했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184년에는 대장군으로 승진해 반란 진압의 총지휘를 맡았는데, 성공적으로 진압을 마치고 영제와 십상시의 탄압 대상이었던 지방 유림 세력인 청류파에게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 위상이 크게 상승하게 된다. 지방 유림 세력이 반란에 합류할 것이 우려되었기에 당고는 해제되었고, 황건적의 난 진압에 합세했던 청류파들은 당고의 해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으며, 황건난 발발 이전부터 청류파를 규합하며 재야의 거두로 떠올라 있던 [[원소(삼국지)|원소]]가 하진을 지지하면서 하진과 십상시와의 대립은 깊어져 갔다. 동시에 하 황후와 영제의 친어머니인 효인황후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188년, 황건적의 난을 필두로 한 반란들이 대충 마무리되자 영제는 스스로 무상장군(無上將軍)[*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즉 최고의 장군이라는 의미로 144년 11월에 도적인 서봉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칭했던 적이 있다.]을 자칭하며 아껴두던 비자금을 풀어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설치하고, 십상시 중 하나인 [[건석]]을 상군 교위로 삼아 [[서원팔교위]]의 통수권을 맡겼고, 이하 중군 교위 원소, 하군 교위 [[포홍]], 전군 교위 조조, 조군좌 교위 [[조융(후한)|조융]], 조군우 교위 [[풍방]], 좌교위 [[하모]], 우교위 [[순우경]](淳于瓊)이 통솔했다.[* 이 중 원소, 조조는 후한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끌 주역이 되어 적수가 되었으며 순우경은 원소의 부하가 되었다.] 영제의 서원군 창설은 각지에서 반란이 잇다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앙군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상군 교위 건석은 무상 장군인 영제를 대리해 서원군을 지휘하는 형식으로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 하진조차 일개 교위인 건석의 명령에 따랐는데, 이는 하진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해석된다. 또 영제는 그해 [[유언(삼국지)|유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 제도를 부활시켰다. 원래 전한 시절 [[성제(전한)|성제]] 시절에 주목을 설치했다가 폐지한 것을 25년 후한이 건국된 이래로 주의 장관을 자사로 부르다가 야심을 품은 유언의 제의로 188년부터 일부 자사를 목으로 바꿔 불렀다. 이 정책은 후한의 호족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 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 후한 말기에 중앙 관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게 되어 [[환제(후한)|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우리는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그 횡포가 극에 달해,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설상가상으로 영제의 실정으로 발생한 [[당고의 금]],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각지의 난으로 인해 지방의 통제력이 더욱 약화된 후한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중앙군의 강화를 노린 서원팔교위와 성격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목은 주의 관원들을 감독하는 감찰관일 뿐 아니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으로, 목이 되면 한 주의 군사력과 인력, 재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어 후한의 지방 자치화, 다르게 말하면 후한의 사분오열을 가속화시켰다.[* 영제 시절만 해도 마등, 한수, 공손찬, 동탁이 어느 정도 군벌화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들은 변경에서 강족, 선비 혹은 자기네들끼리 난투를 벌이느라 중앙정계 입장에서는 관심도 없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군벌화가 되는 건 유언의 건의로 군정권을 가진 주목이 설치되면서부터였고 그전까지 한나라 내륙으로는 군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십상시의 난과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한 왕조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그때부터 군웅할거라는 군벌들의 난투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조정이 "인정해줄 테니까 우리한테 세금 꼬박꼬박 잘 바치고 개기지 마라"라면서 줬던 게 주목이라는 관직이었으니까.]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진압한 관리들은 후한의 분열을 이끌고 있었고, 이미 이때 후한은 [[국가 멸망 테크]]의 궤도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제는 이러한 혼란 속에 중병에 걸려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주색에 빠져서 몸에 많이 해를 끼쳤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일찍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에 뒤이어 일어난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집권은 한나라를 끝장내버렸다. 한마디로 국민들에게 피해만 주고 죽어버린 더러운 황제다. 그래서 그의 시호도 어지럽히고 그 어지러움을 덜어내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의 영(靈)이다. 그의 학정은 [[위진남북조시대]]라는 중국사 최대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400년이 지난 [[수나라]]의 [[문제(수)|문제]]나 되어야 안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