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암사건 (문단 편집) == 발단과 전개 == 제4연대에서는 경찰과의 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군인이 외출만 하면 경찰에게 얻어맞고 돌아오자 제2중대장 [[최홍희]] 참위는 대원들에게 맨손 무술[* [[태권도]]는 1955년 이후에 생겼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외출하여 얻어맞고 귀대하는 대원을 제대시켜 버렸다. 1947년 4월에는 이른바 순천 사건이 일어났는데 4연대의 어떤 병사의 형이 소요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순천경찰서]]에 수감되었고 일을 전해들은 4연대 사병들이 [[광주광역시|광주]]에서 90km 이상 떨어진 순천까지 원정하여 경찰서를 습격했다. 순천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에 영암 사건이 터졌다. 1947년 6월 1일 고향에 가 있던 한 명의 4연대 하사가 귀대하려고 경찰차에 편승했다. 그런데 경찰이 군인의 모표를 소재로 삼아 [[사쿠라]]꽃 같다며 경비대를 조롱했고 당연히 [[반일]] 감정이 드세던 당시에 일본과 관련해 비아냥과 시비를 떨어 대니 ~~친일 경찰의 적반하장을 못 참고~~ 하사는 참지 못하고 상호 구타가 벌어졌고 결국 하사를 폭행 현행범으로 연행해 버렸다. 제1대대 부관이 사정을 알아보러 영암경찰서로 갔지만 경찰은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고 위법 행위를 취조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오던 일행이 지서에 이르렀을 때 보초 순경이 공포를 발사했다. 이에 격분한 헌병이 순경을 구타하자 경찰은 헌병을 연행하고 미 고문관에게 경비대 폭행으로 경찰관 8명이 부상했다는 허위 보고를 올렸다. 한편 4연대에 사건의 경위가 알려지자 병사들 300여 명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총과 실탄을 휴대한 채 ‘경찰 타도’를 외치며 영암으로 질주했다. 6월 2일 새벽 영암 경찰은 망루에 [[M1919 브라우닝|기관총]]을 장치해 놓고 경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경비대는 기껏해야 일제 [[99식 소총]], [[38식 소총]]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이때 부대를 수습하려고 급히 출동한 연대장 [[이한림]] 소령이 호위병을 데리고 협상을 위해 다가갔으나 경찰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까스로 경찰서에 뛰어 들어간 연대장은 사격 중지를 경찰에 요구했지만 그 또한 체포되었다. 이는 미군 경찰고문과 경비대 고문이 와서야 진정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