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산강 (문단 편집) === [[간척]]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산강_1910.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산강_1980.png|width=100%]]}}}|| || 1910년대 지형도 || 1980년대 지형도 || [[나주평야]]의 남쪽 지역은 후빙기에 해수면이 상승하며 형성된 [[만(지리)|만]]이었다. [[영암군/행정#s-1.1|영암읍]]과 [[나주시]]는 지금은 내륙이지만, 과거에 영산강은 감조하천이었고 영암읍내, [[월출산]] 인근, 나주 영산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후삼국시대]] [[나주 공방전]]에서 나주를 점령하기 위한 [[수군]]이 등장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영산강 하류에는 넓은 간석지, [[갯벌]]이 발달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산강간척지.jpg|width=100%]]}}}|| || 영산강 중·하류 지역의 간석지 개간 과정[*출처1 김경수, "영산강 유역의 경관변화 연구: 영산강 시가지 형성과 간석지 개간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2001.] || 간석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조선 후기)로, 영산강의 퇴적과 더불어 17세기 중엽에 삼림이 제거되고 경사지가 훼손되어 주변 구릉지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많아진 것이 간척지 매립을 촉진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1] 자연적인 퇴적 외에도 17-19세기에 인구 압박과 토지 수요 증가에 따라 저지대가 개간되어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근 유지들이 주도하여 여러 개간지가 생겼는데, [[영암군|영암]]의 '지남제들', [[무안군|무안]]의 '소포제들' 등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장항포들', '영화농장들' 등의 개간지가 형성된다. [[8.15 광복|광복]] 후에도 지역 지주에 의해 매립이 지속되어 영암의 '학파농장들', '숭의농장들'이 개간되었다.[*출처1] 1981년에는 [[영산강하굿둑]]이 건설되어 토지가 대폭 늘어났다. 이후로 지형에 큰 변화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