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기 (문단 편집) === 창시자 우스이 미카오의 생애 === * 일본어 고유명사 음역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일본어 표기법]]을 따랐다. 레이키의 창시자 우스이 미카오(臼井甕男)는 [[게이오]](慶應) 원년(1865) 음력 6월 24일(양력 8월 15일)[* 1865년은 조선에서는 고종 2년, 청나라에서는 동치 4년으로, 일본에서는 [[고메이 천황]]이 재위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에도막부의 14대 쇼군으로 재임하는 시기였다.] 오늘날 [[기후현]] [[야마가타시(기후)|야마가타시]] 다니아이(谷合)에서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스이 미카오의 묘비에 따르면 우스이의 호는 暁帆[* 일본어로 어떻게 읽어야 할지가 불명확하다. '아키호'라고 읽을 수도 있고, '교한'이나 '교호'라고도 읽을 수 있다.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효범'이다.]이고, 그의 집안은 [[헤이안 시대]] 말-[[가마쿠라 시대]] 초를 살다 간 무장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 1118-1201)의 자손이라고 한다. 우스이 미카오의 인생은 대부분이 [[메이지 덴노|메이지]]-[[다이쇼 덴노|다이쇼]] 천황 재위기와 겹치지만, 행적의 자세한 내용은 별로 전하지 않는다. 우스이는 십대 중반 무렵에 고향 다니아이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향 다니아이에도 우스이와 관련된 유적이라고는 아마타카(天鷹) 신사란 곳에 있는 석조 [[도리이]]뿐이다. 우스이 미카오가 다이쇼 12년(1923) 동생들과 함께 돈을 모아 신사에 기증했다는 명문이 이 도리이에 있다. 2018년 9월 23일 일본의 레이키인들이 아마타카 신사에 臼井甕男生誕之地(우스이 미카오 탄생지)라고 새긴 큼지막한 기념 석비를 건립했다.] 우스이 집안이 천태종을 믿었기 때문에 우스이 미카오는 천태종 사찰에 들어가 전통적인 사무라이 교육과 함께 불경을 공부했다.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이라 그런지 무술도 함께 배웠다고 한다.[* 영어권 자료에서는 우스이가 1889년에 [[대동류 합기유술]]의 면허개전을 땄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다케다 소가쿠]]로부터 면허개전을 받았다면 이미 일본에서 무술인으로서도 명성이 높았을 테니 사실이 아닌 듯하다.] 스즈키 사다코(鈴木貞子)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우스이는 늘 종교적인 데에 관심하며 안심입명(安心立命)[* 불교용어로 깨달음을 얻어 마음이 평화로워진 것을 뜻한다.]의 경지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배운 불교는 물론 도교, 개항 이후 들어온 서양학문이나 그리스도교까지 접해보았다. 수 차례 중국과 유럽, 미국에도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종교적인 물음에 답을 찾으려 했다. 우스이는 사업가나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했으나 어느 하나 제대로 마음을 잡진 못했다. 그러던 중 우스이와 알고 지내는 어느 선승(禪僧)이 '죽어보는 체험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스이는 죽을 각오로 단식수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다이쇼 11년(1922) 초, 만 56세 나이로 [[교토]] 인근에 있는 구라마산(鞍馬山)[* 오늘날 일본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左京区)에 있는, 높이 해발 584m인 산. [[슈겐도]]의 전통적인 수행처이다. 하필 기도할 곳으로 구라마산을 고른 데에서 우스이 미카오의 종교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에 들어가 삼칠일(21일)간 단식하며 기도하던 중, 온 우주가 일체화되고 영기(靈氣)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 며칠만 굶어도 인간은 몸에서 부족한 열량을 내기 위해 자기 신체의 단백질(근육)과 지방을 이화한다. 몸에 저장할 수 있는 글루코겐과 당은 하루 내지 아무리 길어도 삼일 내에 전소되고, 이후부터는 근육을 분해해 keytogenesis를 하여 카톤바디를 고갈된 탄수화물과 당의 대체연료로 사용한다. 3주간 단식 혹은 초절식을 하면 몸은 100% 키톤체에 의존하는 영양실조 상태. 많은 논문들이 초절식, 단식, 단백질 다이어트를 했을 때, 일시적으로 euphoria 즉 몽환적이고 오묘하게 기분이 좋은 상태가 되고, 굶음에서 오는 마지막 발악(?)으로 키톤체로 인한 뇌의 인지활동이 증폭되나 곧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우스이는 그러니 말 그대로 정신이 아련해지고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또렷해지고 기분이 묘하게 좋은 죽기 직전까지 갔다오는 신비한 체험을 한 셈. [[https://www.ncbi.nlm.nih.gov/pubmed/31700717]] ] 레이키(영기)란 호칭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우스이가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발가락 끝을 다쳤는데, 손을 발 끝에 대었더니 바로 통증이 사라지고 피가 멈추며 상처가 나았다고 한다. 하산해서 어느 식당에 들렀더니 식당 주인의 손녀가 충치 때문에 아파했는데, 우스이가 손녀의 뺨에 손을 대었더니 바로 아픔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thermoreceptor와 mechanoreceptor의 일시적 input으로 생긴 nociception dampening 현상이었을 것이다. Gate Keeping Theory of Pain을 보자.[[https://en.wikipedia.org/wiki/Gate_control_theory]]] 이것이 레이키의 시작이었다. 우스이는 그해(1922) 4월부터 '우스이 레이키 요법학회(臼井霊気療法学会)'라는 이름을 내걸고 도쿄에서 환자 치료를 시작했는데 매우 성황리에 번창했다. 우스이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전수하는 방법을 만들어 레이주(霊受)라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영어권의 영향으로 '어튠먼트'라고 부른다. 우스이는 자신을 조조(肇祖)라 칭하며 제자들을 거두었는데, '조조'란 한자어는 시조(始祖), 개조(開祖)의 동의어이다. 우스이로부터 레이주로 능력을 전수받아 독립한 이들은 사범(師範)이라 불렸는데, 우스이가 평생 동안 거둔 사범은 모두 스물한 명이었다. 도쿄에서 영업을 시작한 이듬해(1923)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우스이는 도쿄에서 제자들과 함께 레이키 요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키를 창시한 지 4년이 지나 다이쇼 15년(1926) 3월 9일, 만 60세 나이에 [[뇌일혈]]로 사망했다.[* 일본 레이키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스이가 뇌일혈을 두 번 겪었지만 모두 레이키로 치료했는데, 마지막 세 번째 뇌일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스이는 레이키의 창시자지만, 레이키 치료사로서는 겨우 4년간 활동했을 따름이다. 사후에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区)의 사이호사(西方寺)란 절에 묘를 썼다. 묘 앞에는 '영법조조 우스이 선생 공덕지비(霊法肇祖臼井先生功徳之碑)'라고 새긴 석비가 있는데, 우스이가 사망한 이듬해(1927)에 세웠다. 비문은 패전 이전의 일본어 문어체로 쓰여 일본인들도 읽기가 쉽지 않다는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