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염상섭 (문단 편집) == 생애 == 1897년 8월 30일 한성부 북서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서 아버지 염규환(廉圭桓)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6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염창섭(廉昌燮)·염명섭(廉明燮) 등 2명의 형과 아래로 염용섭(廉龍燮)·염충섭(廉忠燮)·염형섭(廉亨燮) 등 3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조부 염인식(廉仁湜)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 1901년 중추원의관에 임명됨[[http://sjw.history.go.kr/id/SJW-K38010060-00600|#]]. 1903년에는 영정모사도감 및 진전(眞殿: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건물)중건도감의 별간역 정3품에 임명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K38050240-01200|#]] [[http://sjw.history.go.kr/id/SJW-K38050240-01300|#]]]을 지냈고, 아버지 염규환(廉圭桓)은 구한말 군수였다. 11세 때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친일적인 학풍에 반발해 2년 만에 자퇴하고 보성소학교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이후 191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염상섭은 [[서울]]의 개명한, 즉 신식 문물에 밝은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 당시엔 드물게도 [[조혼]][* 당연히 본인의 뜻이 아니라, 부모와 집안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이 정해 준 아내를 두고 본인이 좋아하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일들이 많았다.]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결국 30대까지 [[총각]]이었다. 지금도 30대 중후반 넘어서까지 결혼을 못하면 그리 좋은 눈으로는 안 보는데, 그때 시각에서 보자면 [[천연기념물]]에 가깝다. [[교토]] 제2부속 중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사학과에 전입하였으나, 1918년 병으로 자퇴한다.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주도한 도쿄 [[2.8 독립 선언]] 사건이 있은 뒤, 혼자서 [[오사카시|오사카]] [[텐노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계획적으로 진행됐던 도쿄 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발표한다. 물론 발표할 때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노동자와 유학생이 모였었다. 특이하게 독립선언 명의를 재오사카 한국노동자대표로 했다.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 잡히긴 하는데, 그 당시엔 독립선언을 불법으로 할 법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쓰레기]](즉, [[전단지]]) 불법투기를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았는데, 변호사를 대지 않고 직접 자기 변론을 하며 뛰어난 언변 실력을 보여 일본 [[판사]]가 염상섭을 꽤 귀여워했다고 한다. 재판정에 선 염상섭은 당시 일본치하에서 조선의 비참함과 현실을 호소했는데 방청객과 판사가 꽤나 감격했고, 이때 판사가 염상섭에게 변호사가 되기를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간수]]도 그를 귀여워해서, 출옥할 때 간수와 기념[[사진]]도 찍었다고 한다. 그 기록은 [[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일:hgjhglgljll.jpg|width=40%]] 1919년 [[3.1 운동]] 직후 검거돼 복역한 뒤 석방될 때 일본인 간수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한 염상섭(가운데). 그 후, 그런 일이 이슈가 되어 귀국하고 [[동아일보]] 1기 특채 정치부 기자로 일한다. 월급도 후했고 전용 인력거까지 제공받았다고 한다. 그 후 [[동아일보]] 기자와 작가 생활을 하였고 1920년대 초반에는 [[홍기문]]과 격렬한 키배를 뜨기도 했다, 일제 말엽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절필하고 [[만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다. [[광복]] 후 만주의 재산을 정리해서 돌아왔는데, 당시 문학 단체에서 일한 경력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 생활을 하였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취우>. 말 그대로 전쟁도 한때의 소나기라는 이야기. 전쟁 자체의 묘사보다 점령지에서의 일상 생활을 밀도 있게 그렸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해군]] 정훈병과 [[소령]]으로 임관하고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전후 [[1954년]]에는 예술원회원에 선임되고,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3월 14일 아침 [[성북동(서울)|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에 있다. [[종로]] [[교보문고]] 광화문점 앞에는 그를 기념하는 등신대 동상이 있다. 본래 이 동상은 종묘 앞에 위치해 있었으나 [[종묘]] 성역화 사업으로 삼청공원에 이전하였다가, [[2014년]] 4월 1일에 다시 이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