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염계군벌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산서군벌이 산서 바깥의 충돌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1924년의 [[2차 직봉전쟁]]으로, 옌시산은 [[봉천군벌]]에 호응하여 [[직예군벌]]이 석가장으로 북상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펑위샹]]의 국민군이 산서성에서 재기를 노리자 [[장쭤린]], [[우페이푸]]와 손을 합쳐 [[직봉풍전쟁]]에서 이들을 격파하였고 1926년 3월, 산서성의 국민군을 모두 축출한 후 수원성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초기에는 장쭤린의 편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고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대세가 국민당의 편에 기울었다고 판단, 국민혁명군 3집단군 사령관 겸 북방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봉천군벌과 교전하고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이 공으로 옌시산은 산서성 정부주석, 경진위수사령 등에 임명되고 [[탕산회의]], [[편견회의]]의 핵심 4거두로 참가하는 등 국민정부의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으로 등극하였다. 1928 ~ 1929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편견이 시작되면서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상당히 불만을 품게 되었다. [[리쭝런]], [[바이충시]], [[펑위샹]], [[탕성즈]] 등이 잇달아 일으킨 반란에 옌시산은 일단은 눈치를 보며 장제스의 편을 들었으나 결국 1930년 [[중원대전]]에서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중앙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중원대전은 [[장쉐량]]이 장제스를 옹호하면서 참전함에 따라 반장군의 패배로 끝났고 [[반장전쟁]]은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옌시산은 [[관동주]]로 망명하여 [[관동군]]의 보호를 받았고 산서군벌은 그동안 [[쉬융창]]이 임시로 이끌었으나 산서성 바깥의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정치적으로 장쉐량에게 완전히 복속된 처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