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일본의 폭주와 중국의 대응 ==== 일본군이 산해관을 공격하고 있단 소식은 1월 3일 국민정부에 전해졌다. 초공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항저우에 막 도착했던 장제스는 이 소식에 즉각 군사위원장 명의로 장쉐량에게 타전했다. >"왜구의 행동이 어떻게 변하든간에, 우리 군이 조속하게 열하로 진군하는 계획을 결코 변경해서는 안된다. 일본 측의 계략은 지극히 교활하다. 만약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일이 있으면 사전에 꼭 중앙과 검토할 것." 하지만 이 전보를 보내자마자 산해관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장제스도 난징으로 돌아와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한편 일본은 우치다 야스야 외상의 명의로 1월 4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탈리아 5개국 대사에게 사건의 경과에 대해 설명하고 일본은 사건의 확대를 원하지 않으며 국지적 사건으로 현지에서 교섭해서 해결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시종무관장 나라를 통해 군대의 진공이 [[국제연맹]]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이니 일이 커지지 않게 하라고 육군에 경고하였으며 마키노를 시켜 어전회의 소집을 제안했으나 소집되진 않았다. 상층부의 비확전의도와는 별개로 군부의 폭주는 걷잡을 수가 없어 주일 중국공사 장작빈은 외무성 출입기자들 사이에 일본군의 열하 진공이 방침으로 정해졌다는 보고를 올렸다. 1월 7일에는 베이징에서 톈진 총영사 구와미자와 톈진 주둔군 사령관 나카무라가 비밀리에 회담하여 관동군의 열하 진공을 돕기 위해 베이핑에서 소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1월 9일 일본군 해군 육전대가 진황도에 상륙했고 일본군 전차대가 배치되었다. 1월 10일 일본군은 구문구 요새를 점령, 대포를 설치했다. 1월 11일 육군은 "열하성이 만주국의 일부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열하성 안에서 치안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만주국의 불령분자다."라고 주장하며 열하작전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만주국의 내부를 안정시키려는 경찰작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월 13일의 각의에서 사토 내각은 열하성에 대한 국지적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1월 14일 참모총장 간인노미야가 만주에 병력을 추가파병하는 것을 윤허해줄 것을 요청하자 히로히토는 열하성 방면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대처를 주문하며 열하에 대한 군사작전이 실패할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1월 16일에는 "지금까지는 만주 문제를 '''잘 해왔으나''' 열하 방면의 문제도 있으므로 충분히 신중하게 처리하여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같은날 일본군 4여단장 스즈키가 산해관 상공회의에서 일본군은 산해관을 중립지대로 삼고 철수할 것이라며 일본군은 탄약이 충분하여 몇년이고 싸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1월 19일 내대신 마키노의 상주에 따라 히로히토는 간인노미야의 병력 추가 파병을 윤허하였다는 것을 내각에 알렸다. 1월 21일 우치다 외상은 [[귀족원(일본)|귀족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만주, 몽골과 중국은 만리장성에 의해 나누어지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또 열하성이 만주의 일부인 것은 만주국 건국 경위만 보더라도 명백하다. 최근 열하성 안에서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자가 있을 뿐 아니라 장쉐량 휘하의 정규군으로서 국경을 넘어 성내로 침입하는 자도 있다. 일만의정서에 의하면 만주국 영토는 일만 양일이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열하문제는 만주국의 국내문제이며 또 일본은 조약상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열하와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열하작전이 대외 팽창이 아니라 경찰작전에 불과하다는 육군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23일에 장제스는 난징에서 장쉐량과 [[돤치루이]]를 불러 회담했다. 이날의 삼자회담에서 중앙군 참모단과 중앙군 6사단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한편 장제스에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화북으로 와달란 요구가 계속되었으나 [[초공작전]]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는 노릇이라 장제스는 북상할 수 없었다. 1월 27일 장작빈이 [[사이온지 긴모치]]가 곧 내각 개조가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소장파 군인들이 정치를 휘두를 수 없게 되어 곧 일본이 중국에 접근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것을 알려왔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믿지 않았다. >"침략은 일본 전통의 정책이다. 일본의 정책은 어느 정도 큰 타격을 입지 않는 한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 만약 열하공격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단을 완하하는 것이리라. 어찌 이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같은날 관동군 사령관 무토는 "열하성의 형세는 날로 험악해지고 있으며 만주국의 기초 확립을 위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세가 되었다. 관동군의 작전행동상 중요한 시기가 닥쳐왔다."고 훈시하고 1월 28일 관동군 출동 명령을 내렸다. 열하에 대한 군사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감지한 국민정부는 2월 6일 베이핑의 고궁박물관에 있는 1만 상자의 유물을 남쪽으로 소개했다.[* 이 유물들이 나중에 타이완으로 건너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을 빛내게 된다. 2월 6일에 한꺼번에 나른 것은 아니고 5월 중순까지 2천상자씩 나누어 소개시켰다.] 2월 10일 장쉐량은 사령부를 베이핑에서 러허성의 성도인 [[청더]]로 옮기고 러허성 사수 의지를 곧추세웠고 [[행정원장]] 대리 [[쑹쯔원]]도 베이핑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발표했다. >"열하는 중국의 일부이며 마치 광동, 강소 등과 같다. 열하에 대한 공격은 수도에 대한 공격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공격을 실행하면 우리는 전국의 힘을 모아 대항할 것이다." 같은 시각 일본군의 침략 준비도 착착 완료되어 가고 있었다. 2월 4일 히로히토는 만리장성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열하성 작전을 재가했다. 2월 8일 사이토 내각은 국제연맹 관계상 열하침공이 어렵다고 반대했다. 이에 히로히토는 2월 10일 간인노미야에게 열하 작전 중지가 가능한지 물었다. 2월 11일 사이토는 열하를 공격하면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제명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히로히토는 통수권자의 직권으로 작전을 중지시키는 것을 고려했으나 시종무관 나라가 이것이 정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자 그만두었고 사이토 내각도 일본 군부의 완강함을 꺾을 수 없어 열하 작전을 승인했다. 2월 12일 히로히토는 열하 작전에 대한 두번째 재가를 해주었다. 관동군은 2월 9일 열하경략계획을 수립, 20일부터 전투배치에 들어갔다. 관동군은 만주국군 4만 2천명과 2개 사단, 1개 독립혼성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비행대대와 전차 중대까지 동원하여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같은날 사이토 내각은 국제연맹 탈퇴를 비밀리에 결정했다. 21일 관동군의 진격이 시작되어 조양과 개로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탕위린은 이 상황을 전국에 타전하고 원조를 요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