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일본의 1차 화북공세(1933.4.11~1933.4.19) ==== 국제적 정세가 긴박한 가운데 3월 10일 새벽에는 장성 전역에서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11일 란저우 복쪽 60킬로미터 지점인 냉구가 함락되고 13일 계령구도 3일 밤낮에 걸친 전투 끝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대두영을 거쳐 무령으로 진격했고 쑹저위안이 사수한 희봉구 역시 위기에 처했다. 일본군의 이러한 움직임에 영국 공사 램프슨을 중재역으로 삼아 정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일 일본 공사관원 나카야마가 램프슨과 면담하고 정전교섭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다. 이에 허잉친도 베이징 대학장 장몽린(장멍린), [[후스]] 등 지식인과 논의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장몽린이 개인 자격으로 램프슨에게 정전 조정을 의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아랑곳않고 진격했고 20일 창려, 북대하 등이 함락됨으로 란저우 동쪽 전역이 함락되어 베이핑과 텐진이 위험해졌다. 일본군은 이미 톈진에서 200km도 떨이지 않은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바오딩까지 북상했던 장제스는 3월 26일 다시 난징으로 돌아와 외유에서 돌아와 행정원장에 복귀한 왕징웨이, 쑨커, 다이지타오 등과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 및 일본의 열하침공을 틈타 확장하는 공산당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다.[* 항일에 앞장선 공산당 운운하지만 최소한 강서시대 공산당의 항일구호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했으며 공산당이 항일을 하긴 커녕 항일을 위해 차출되는 국민당군을 습격하고 후방을 공격하는 등 오히려 항일에 방해만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날 회의에서 장제스는 '대일 방위와 대공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당면방침을 제시했다. 이때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는 일본이 장성배후를 칠 준비를 하는 모습에 하주국 휘하의 2군단 57군은 석문채에 전진배치하고 석하를 방위선으로 삼으며 란저우를 2차 방위선으로 하는 수비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장제스가 난징에 도착했던 3월 26일, 일본군 8사단 4여단이 항공기와 전차를 대거 동원하여 공세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3월 27일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가 장성 이남에서의 활동을 금지하는 정부 방침을 씹고 491호 명령을 발동하여 장성 이남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고 구문구 방면에서 시작된 공세에 일본군의 화력이 압도적이라 4월 1일 석문채가 함락되었고 일본의 장성 이남에서의 군사행동에 다시 국제적 관심이 주목되었다. 베이핑 주재 각국 외교단은 4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일본 공사관에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할 것이며 신축조약을 통해 보장된 주병권을 이탈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외국의 목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4일 밤 진황도의 후배 지역인 해양진을 점령, 5일에는 란저우에 폭격을 가했다. 4월 11일부터 관동군은 독자 작전에 돌입하였다. 4월 22일 장제스는 허잉친에게서 장몽린-램프슨 정전교섭에 대한 양해를 요구받았다. 장제스는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왕징웨이와 연락하여 정전교섭을 진행하기로 했다. 허잉친에게 장제스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장몽린과 영국 공사 두 사람이 조정문제를 다루는 것은 좋다. 그 준비와 적절한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왕징웨이|왕 원장]]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릴 준비를 갖추도록 전보로 연락해 놓았다. 단, 다음 네가지 점에 특히 주의하기 바란다. > >1. 이 문제는 사회의 유력자 힘으로 추천하되, 국제적 문제로 끌고 가고, 정부 인사들은 얼굴을 내밀지 않는 것이 좋다. > >2. 대체적인 방침은 우선 화북의 군인들 의견에 따를 것이다. 군장 이상의 장군을 일단 개별적으로 초치하여 타진할 일이다. > >3. 사회지도자와 군인의 의견이 일치되거든 그들로 하여금 중앙부에 건의시킨다. 중앙부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형식을 갖춘다. > >4. 공명심이 강한 군인에 대해서는 사전에 직접 얘기해두는 편이 좋겠다. 이 문제를 끌고 갈 사회적 유력자를 시켜 간접적으로 설명하게 하면 좋겠다." 4월 22일 장몽린은 램프슨을 찾아가 상하이 때 영국이 보여준 성의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중국 측은 베이핑의 외교부차장 유숭걸(류충제)이 정부대표가 되며 모든 책임을 행정원장 왕징웨이가 질 것임을 전했다. 램프스은 이러한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주중 미국공사 넬슨 존슨에게도 알렸다. 하지만 외교부장 뤄원간이 중일 직접 교섭을 반대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당시 중화민국 외교부는 일본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교섭에 반대하고 있었다. 22일 밤 외교부의 아시아국장 심근정이 램프슨에게 자신이 장몽린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훈령을 받은 바 없다고 알리자 램프슨은 조정을 보류했다. [[뤄원간]]은 유숭걸에게 전보를 보내 정전협상에 반대했고 황부와 허잉친에게도 강경한 항전 의사를 드러냈다. >"장성항전 시기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 동북 지방의 영토를 되찾을 수 없게 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하더라도 국제연맹의 규약과 결의안에 의거하여 적당한 방법으로 모든 중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체결하더라도 일본군이 다시 진격해 압박하면 베이핑과 톈진을 잃게 될 것이므로, 정전협정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때 장제스는 허잉친에게 추가적인 지시를 내렸다. >"기한을 지켜 북경성의 방위공사를 적극적으로 완성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밀운이 함락되어 동쪽의 방위선이 확보되지 않게 되면 이곳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의 평화해결 움직임은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효과가 없을는지도 모르고, 시간적으로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준비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준비만 하면 완급 어느 쪽에도 대처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이 베이핑, 톈진을 공격할 기미가 보이거든 그 즉시 고북구 방면의 정예부대를 비밀리에 베이핑에 입성시켜 배성차일의 계로써 대비하도록 [[허잉친|형]] 등은 조속한 준비를 진행시키는 것이 좋겠다. 나는 전문을 침과 동시에 난징으로 연락하여 제88사단[* 88사단은 장제스의 직계 부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예부대로 1차 상하이 사변에서도 활동한 전력이 있는 부대였다.]을 은밀히 베이핑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국민정부는 유숭걸에게 연락해 영국공사 램프슨, 프랑스 공사 윌던, 미국 공사 존슨에게 일본군이 베이핑과 텐진을 공격한다면 중국군이 항전하는 것을 전제로 각국 공사들이 적극적으로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모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유숭걸은 뤄원간에게 공사들의 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군의 4월 공세는 상부의 재가를 받지 않은 독자적 행동이었고 이 때문에 히로히토가 개입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중지시킬 것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4월 19일 일본군은 군대를 돌려 관외로 철수했다. 하지만 이런 내부 사정을 외국에선 알지 못했으므로 온갖 추측이 오갔다. 톈진의 대공보는 병력 부족과 국제적 간섭을 두려워 일본이 철수한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관동군과 육군 중앙 등은 관내 진출을 위해 계속하기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관동군 참모본부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화북에 괴뢰정부를 만들어 일본에 호응하게 하기 위해 돤치루이, 쑨촨팡 등과 접촉하였으나 이들은 일본의 접촉을 모두 거절했다. 이에 전 호남독군인 [[장징야오]]와 [[스여우싼]] 등과 재차 접촉했는데 장징야오가 호응하여 자신이 쑹저위안과 친분이 있다면서 쑹저위안을 끌어들이겠다고 나섰다. 이에 이타가키는 장징야오에게 공작금 30만원을 지급하였고 4월 18일 관동군에 전보를 쳐 4월 21일이면 장징야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쑹저위안이 호응할 것이니 관동군이 남하해야 한다고 김칫국을 마셨으나 4월 19일에 철수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무산되었다. 이타가키는 4월 26일이나 27일에 중국군 112사단이 반란을 일으키고 쑹저위안 등이 호응한다 운운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