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열하사변 (문단 편집) ==== 장성전투 ==== 열하를 함락시킨 후에도 일본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무토 사령관은 3월 4일 만리장성의 주요관문을 탈취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장성의 소유권을 놓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첫번째 격전장은 베이핑 동북쪽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고북구였다. 고북구는 열하의 성도인 청더와 베이핑을 잇는 장성관문으로 전략적 요충지라 베이핑을 사수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는데 중국군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 장쉐량 휘하의 양걸과 허잉친의 군대는 북상하면서 고북구 방면에서 일본군에게 반격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원래 계획에는 양걸 휘하의 8군단 67군을 고북구에 주둔시키고 107사단을 북상시켜 장성 북쪽 청석량에서 일본군에 맞섰단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진격속도가 너무도 빨라 107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07사단의 선봉인 621단은 3월 5일 밤, 청석량 인근의 노호산, 마권자, 황토량 인근에서 일본군과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전차 2대와 장갑차 2,30대로 중무장하고 있었으나 621단은 일본군은 전차 2대를 파괴하고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면서 3월 7일 새벽에 격전이 벌어졌다. 중국군도 619, 620단을 추가 투입하여 맞서 3일 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107사단은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는 참혹한 피해를 치러야 했다. 이에 67군 군장 왕이철은 3월 9일 107사단을 후퇴시키고 112사단을 배치했으나 일본군은 107사단이 철수하는 틈을 노려 3월 10일 장성에 육박했다. 또한 같은날 고북구 동쪽 5킬로미터 떨어진 장군루 역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국군의 저항은 치열했으나 3월 11일 아침 일본군 항공기들이 폭격을 퍼붓자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쉬저우에서 달려온 중앙군 17군 소속 25사단이 도착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7일 오후 고북구 남쪽으로 철수했고 고북구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고북구 동편 100킬로미터 지점의 회봉구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희봉구는 쑹저위안 휘하 3군 29군 소속 37사단과 38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37사단은 3월 9일 오후 희봉구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평천에서 남하한 일본군은 8사단 혼성 14연대가 장성의 최고지점을 점령한 상태였다. 37사단 217단 단장 왕장해는 일본군을 급습해 장성을 탈환하였으나 일본군이 다시 반격해 함락시켰다. 오후 11시, 37사단장 풍치안은 110여를 217단의 증원부대로 출동시키고 2개 영을 우회시켜 일본군 배후를 공격하게했다. 이들은 일본군 보급물자에 불을 지르고 기관총 10여정을 노획하고 돌아왔다. 3월 10일부터 일본군이 반격했고 3월 11일에는 일본군의 총공격이 벌어졌다. 3군단 부총지휘 친더춘은 38사단장 장자춘, 37사단장 풍치안과 협의하여 정예 여단 2개를 선발해 반가구에서 일본군 배후를 기습하였다. 11시 반 반가구에서 출동한 중국군 1개 여단은 난하를 따라 3킬로미터 북상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12일 새벽 5시 제가욕 일대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몰아내고 중국군을 맹폭하던 일본군 포병 진지를 함락시켰다. 날이 밝자 일본군은 반격해왔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야포와 탄약을 파괴하고 기관총과 군용지도 등의 다수의 군수품을 노획하여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또 다른 1개 여단은 반가구 북동쪽의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여 10대의 차량을 파괴하고 12일 오후에 복귀했다. 이 두개 여단의 활약으로 18문의 대포가 노획되었으며 일본군 800명이 전사, 부상당했다. 이들이 유명한 쑹저위안의 [[항일대도|대도대]]다. 3월 16일 희봉구 서남쪽 30킬로미터 지점의 나문욕을 일본군이 공격했으나 유여명이 지휘하는 29군 부대들이 3일 간의 교전 끝에 이들을 저지했다. 따라서 희봉구 일대 장성은 모두 중국군이 사수하게 되었는데 이는 열하사변이 발발한 이후로 중국의 첫 승리였다. 장제스는 크게 고무되어 23일 쑹저위안에게 위로 전보를 보냈다. >"적을 퇴각시켜, 용기를 고무하고 높은 전의를 얻었다. 그러나 조등우 여장이 부상을 당하고, 왕봉지 영장은 전사했다하니 그 격렬함을 짐작하겠다. 실로 마음 든든한 한편 슬프다." 3월 19일자 익세보 역시 희봉구 전투에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인이 [[베르됭 전투|베르됭]]의 영웅을 잊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은 영세만대에 걸쳐 희봉구의 영웅을 잊지 못할 것이다. 희봉구에서의 몇 차례에 걸친 전투에 의해 우리 중국인은 이제 인격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기를 장성항전이라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