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산군묘 (문단 편집) == 역사 == 조선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이 재위 기간 동안의 실정으로 인해 관민의 원성과 반발을 사게 되면서 결국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축출되어 폐주가 되었고, [[君|군]](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을 가서 2개월 후인 그 해 11월 사망하게 되면서 그곳에 묻혔다가 1513년 연산군의 아내 [[폐비 신씨]]의 청이 받아들여져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해동면 원당리[* 후에 [[경기도]] 양주군에서 [[서울특별시]] [[도봉구]]로 편입되었다. 원당이라는 이름은 연산군묘 바로 앞에 위치한 원당샘이라는 조그만 약수터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에 대군 신분의 예우로 안장되었다.[* 원래 여기는 [[세종(조선)|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봉토였는데 세종의 명으로 의정궁주 조씨(태종의 후궁)의 봉사손이 되면서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처음으로 자리하게 됐다. 이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폐비 신씨의 요청을 [[중종(조선)|중종]]이 들어주면서 연산군 가족의 묘가 함께 자리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폐비 신씨]]는 1488년 [[왕세자]]인 연산군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이 되었고,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고, 1537년에 사망하고 나서 연산군묘 옆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