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참 (문단 편집) == 역사 == 전통적인 '역'의 개념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로, 이때도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고 이동은 이런 역을 거치며 했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인 위치나 전국 역참의 목록 같은 것이 따로 남아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신라]] [[소지 마립간]]이 설치한 우역(郵驛)이나, 역 이름까지 남아있는 사례로는 [[울산광역시]] 지역에 설치한 굴헐역(屈歇驛)이나, [[충주시]] 근처에 설치한 욕돌역(褥突驛) 등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국내 이동뿐 아니라 주변국으로 역이 쭉 이어지는 노선도 정비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천정군(지금의 [[원산시]] 일대)부터 [[발해]]의 책성부(동경 용원부로 추정)에 이르는 길목에 39개의 역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전국 도시나 주변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에는 역참이 줄지어 있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려 때는 전국에 22개의 길과 525개의 역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을 정복한 [[몽골]]([[원나라]])은 중국뿐만 아니라 몽골 등 지배 전역에 걸쳐 역전제도를 실시했고 [[명나라]] 또한 원의 역참제도를 계승, 발전시켰다. 명나라 시대의 역참은 1700곳이 넘었고 명나라 조정은 역참 도로의 포장, 보수부터 각 역참 사이의 이동기한에 이르기까지 역참관리를 매우 빡빡하게 하였는데 명의 역참제도는 [[티무르 제국]]의 사절단이 감탄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기존에 역원을 대부분 [[절(불교)|절]]들이 운영하던 것에서 전부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 시설로 바뀌어 역마다 책임자인 종6품 찰방(察訪)을 임명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 비슷한 역할을 하던 [[원(숙박시설)|원]](院)을 점차 흡수된 이래 [[구한말]]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당시 도로는 군사적인 목적이 강해, 조선시대 역은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사찰]]이 역의 역할을 했던 게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고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중세 [[유럽]]에서도 [[수도원]]이나 [[성당]] 등에서도 숙박업 등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당시에는 나라에서 직접 곳곳에 숙박/교통시설을 운영하기에는 행정 능력이 부족했고, 민간 자본으로 운영하기에는 [[자본주의]]나 기술력이 충분히 뒷받침될 만큼 발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노숙]]을 하자니 [[치안]]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범죄자]]들이나 자연 개발이 덜 된 탓으로 설쳐대는 맹수들이 많았기 때문. 그런 상황에 일반 [[마을]]이나 [[영지]]에서 떨어진 교통의 요지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하고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자체 방어가 가능한 수준의 일정한 인원과 시설을 갖춘 비교적 안전한 쉼터는 종교시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중세만 해도 중세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자체 방어를 위해 [[수도자]]나 [[승려]]가 무술을 연마하거나, 절이나 수도원에 성벽을 쌓아 요새화 하는 게 의외로 흔했다. 중세 유럽의 수도자가 [[전쟁]]에 참여한 사례도 있고, [[고려사]]에도 [[서경(고려)|서경]] 반란 진압 당시 자원해서 참전한 관선이라는 [[승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혼자서 반란군 십여 명을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의 [[승병|소헤이]]는 아예 도를 넘어 유력 사원이 사실상 지방 영주화된 케이스. 종교시설/교단 입장에서도 숙박비와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열리는 [[시장(경제)|시장]] 기능, 여기에 기본적으로 운영자금을 대기 위해 나라에서 주거나 [[교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혹은 사람이 모이면서 자체 노동력으로 개간하는 재물과 논밭, 여행자들이 무사여행을 빌면서 내는 재물들 덕택에 역원은 상당한 수입원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족으로 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 시설이 부분적으로 행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 행정 실무에 필수적인 글을 아는 사람들이 그나마 많은 곳은 종교시설뿐이었으니까. 지금도 [[독일]]에서는 [[결혼식]]을 하면 근처 교회에 이를 등록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 중세 시절의 문화가 아직 남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