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포 (문단 편집) ==== [[왕윤]]과의 갈등 ==== 왕윤은 여포를 분위장군, 가절로 삼고 의례는 삼공에 비견되도록 하고(의동삼사, 儀同三司) 온후(溫侯)로 올려 봉하여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정사 삼국지]], [[후한서]], [[자치통감]] 모두 분위장군(奮威將軍)이라고 하지만 유독 [[송서]] 백관지에서만은 여포가 분무장군(奮武將軍)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무래도 비슷한 최하의 장군직급인 잡호장군인 데다가 위(威)와 무(武) 비슷하게 생긴 글자라 송서에서 오류가 난듯하다. 어쨌거나 분위장군의 뜻은 위력을 떨치는 장군이라는 거창한 칭호지만, 실상은 명예직으로 즉 의례를 비롯한 격식은 삼공이라는 조정의 최고 위치로 대우하며 체면을 세워 주고, 실질적인 권한은 제어하려고 한 것.] 후한서 왕윤 열전에 따르면 애초에 왕윤이 동탁의 부곡(部曲) 사면을 의논하고, 여포 역시 수차례 그러도록 권한다. 그 뒤 의심하여 말한다. >이 패거리는 죄가 없고 [[동탁|그 주인]]을 따랐을 뿐이지만, 지금 흉악한 역적으로 일컫고 특별히 사면해준다면 스스로 의혹을 일으키게 하기에 족하니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오.[* 이는 여포가 스스로 동탁을 죽인 후 양주인을 두려워하고 꺼리었고 양주인 들도 모두 여포에 원한을 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포도 동탁의 재물에 대한 처분을 두고 왕윤과 서로 의견충돌이 굉장히 심했는데[* 여포는 공경, 대신, 장교에게 나누어 주자고 왕윤에게 제안했다.] 정작 왕윤은 평소 여포를 가볍게 보고 검객으로 대우해서 이에 여포는 이전부터 그 공로에 기대어 스스로 자주 으스댔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왕윤에 대해 점차 불만이 쌓이고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동탁 잔당에 대한 처리를 놓고 그렇게 왕윤과 여포와의 사이가 멀어지자 이틈을 노린 [[가후]]는 [[이각]] 등 동탁의 잔당을 사주하여 난을 일으키자고 제안하자 이들은 마침내 서로 결탁한 뒤 돌아와 장안성을 공격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곽사]]는 성 북쪽에 있었다. 여포는 성문을 열고 군을 이끌고 곽사에게로 나아가 말했다. >군사들을 물리고 다만 우리끼리 몸소 싸워 승부를 가름하자.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모(무기)|모]]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이 앞으로 와 곽사를 구했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각각 그만두었다. >여포: 공도 함께 가시지요. >왕윤: 국가를 평안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니 만약 이를 이루지 못하면 몸을 바쳐 죽을 뿐이오. 동탁이 죽은 후 60일이 지나 왕윤정권이 무너지고 마침내 이각 등은 장안으로 들어왔다. 이때 이각, 곽사전 주석 한기에 따르면 여포는 군이 패하자 청쇄문 바깥에 말을 세워놓고 왕윤을 데려가려 했으나 그가 거절했다. 결국 여포는 기병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을 나와 [[원술]]에게로 가려 했다.[* 이때 아내와 딸은 놓고 가야 했으나, 지인이 후일 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