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포 (문단 편집) === [[유비]]와의 관계 ===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면 두 사람에게서 살펴 볼 수 있는 다소 이중적인 면모나 여러 특이점 때문에 의구심이 들게 되는데, 이유는 정사에도 적혀 있다시피 인의의 대명사인 [[유비]]가 여포의 죽음을 거들었고, 또한 인간 통찰의 대명사인 유비가 인간 관계에 처음으로 실책을 했던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기준으로 여포는 이미 [[정원(삼국지)|정원]], [[동탁]]을 배반한 전력이 있어서 배신의 명수인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진군이 여포의 배신을 미리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능력이 있는지 사람 보는 눈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던 유비를 제대로 등쳐먹는데 성공했다는 것. 이는 조표와 허탐같은 서주 호족들이 거들어서 가능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들이 굳이 여포를 선택한 것은 연주에서 조조를 버리고 독립하려던 진궁, 장막같은 연주 호족들이 여포를 바지사장으로 써먹으면 되겠다고 판단한 것과 같은 이유로 보인다. '왜 [[유비]]가 배신으로 유명한 여포를 받아들였는가?'에 대해서는 일단 이 시기에 여포와 유비에게는 '[[조조]]'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유비는 사람들의 추대로 서주를 차지했지만 [[조조의 서주 침공|조조의 두 번에 걸친 대깽판]]으로 서주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유비로서는 비록 신의는 없지만 무장으로서 검증된 여포를 그냥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음에도 조표를 비롯한 구 도겸파는 유비에게 적대적이었고 [[조조의 서주 침공|조조에 의해 초토화 되어]] 나가리가 된 서주의 상황으로는 조조의 재침을 겪으면 막기 어렵다고 판단해 여포를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라는 가설이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유비가 여포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전략적으로 이득이 될지도 알 수 없다. 여포가 비록 근거지가 없이 떠도는 장수로 전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휘하에는 [[장료]], [[고순]]이라는 용맹하기로 이름높은 동료 무장들과 잔여 병력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여포가 역적 동탁을 죽이고 여기저기서 명성을 날린 '이름값'이라는게 또 만만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근거지를 내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결국 갈 곳이 없는 여포는 정말 필사적으로 유비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싸운다 해도 근거지를 갖추고 있는 유비가 훨씬 유리하겠지만, 여포의 공격에 병력 손실이 누적이 된다면 유비의 앞날은 알 수 없으며 [[조조]], [[원술]]과 같은 강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포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며 여포가 만일 서주의 군현을 약간이나마 점령하여 기지를 만들고 [[원술]] 등의 후원을 받아 세력을 유지한다면 유비에게는 내장에 우환이 박히는 격이다.[* 사실 조표 같은 구 도겸의 잔당들이 처음부터 딴 마음을 먹고 유비에게 여포를 들이자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비는 도겸의 은혜를 입은 만큼 그 부하였던 이들의 말을 함부로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대인의 풍모로 여포를 받아들여 여포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었을 수 있는 것. 그 시기에 유비보다도 몇 배는 군사력이 강했던 원소조차도 여포와의 정면 대결은 피했으며 조조 또한 여포를 처리하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것을 보면 조조, 원소보다 훨씬 군사력이 약했던 유비가 여포와 싸우는게 오히려 무모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당시의 관례를 보는 시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후한말의 난세에는 이러한 류의 객장(客將)이 자주 등장했는데, 여포 이외에도 [[유표]]에게 의탁한 [[장수(삼국지)|장수]], [[공손찬]], [[조조]], [[원소(삼국지)|원소]]에게 의탁한 '''[[유비]] 본인,''' [[장로(삼국지)|장로]]와 [[유비]]에게 의탁했던 [[마초]]를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객장을 받아들이는 군웅 역시 객장들을 경계했고 이들간에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객장이 존재했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의(義)로서 따져볼 때 자신에게 의탁하는 객장을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술]]의 경우에는 원씨 가주로서 여포가 동탁의 수하였을 때 원씨 일족을 죽였다는 구실이 있었고, [[원소(삼국지)|원소]]는 대놓고 거부하기는 어려워서 겉으로 받아들이고 암살자를 보내는 식으로 뒷치기했다. 즉, 여포가 의탁하러 왔을 당시에는 [[유비]]로서는 여포가 설사 의심스럽다고 해도 여포를 배척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았다. 나중에 배신했으니 '여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은 다소 결과론적인 생각인 것. 또한 제아무리 유비가 사람 보는 눈에 도가 텄다고 해도 여포랑은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아는 거라곤 오직 소문으로 들었던 행보뿐인데 여포란 놈이 어떤 놈인지 어떻게 정확하게 알겠는가? 좀 생활해 봐야 사람 보는 눈이 통할텐데 그러기도 전에 받아들이냐 마냐의 갈림길에 놓였던 측면도 있는 것이다. 여포 때문에 근거지를 잃고 죽을 뻔하고 진군도 유비의 밑을 떠나버렸으니 명백한 실수가 맞긴 하지만, 뒤집어서 보면 여포를 받아들여 빚을 지워둔 덕에 여포가 유비를 죽이지 않고 객장으로 거둬들여 소패에 두었으니 빚을 지워두길 잘 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아무튼 자기의 목이 더 위험해서 만만한 유비를 방패막이로 세울 셈이긴 했지만 어쨌던 원술이 대군으로 침공했을때 유비와 기령의 싸움을 막아주는 등 드물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여포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번번히 [[뒤통수]]를 치면서 사방에서 [[어그로]]를 끌어모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