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의도 (문단 편집) === 1970년대 === 여의도 비행장이 폐쇄되고,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은 주택 공급 문제와 신시가지 개발 목적으로 여의도 개발 계획을 세운다. [[파일:external/www.knnews.co.kr/20140516.01010114000003.01L.jpg]] 초기 여의도 개발 계획. 현재와 비슷해 보이지만 디테일하게 보면 상당히 다르다. 당시 건축가 [[김수근]]은 그의 [[도쿄대학]] 은사였던 [[단게 겐조]](丹下健三)의 '도쿄계획 1960'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서 '여의도종합개발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동서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1층은 차로, 2층은 보도데크로 구성해서 입체적인 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설계안으로, 한국에서는 21세기 대형 주상복합에서나 실현되고 있다. 여의도 뿐만 아니라 [[세운상가]]에서도 이와 같은 설계를 하였으나 세운상가 역시 시행 과정에서 흐지부지되어 보도데크는 단순 복도로 변질되었고 현재는 흉물이 되었다.] 중앙부에 상업지구가 들어가 있으며, 좌측(서쪽)에는 국회의사당과 서울특별시청, 우측에는 법조단지가 예정되었다. 1970년 2월 10일 [[밤섬]] 폭파로부터 불과 110일만에 여의도 윤중제[* 현 여의방죽]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윤중제 공사만으로도 서울시 재정에 무리가 가고, 김현옥 시장이 벌인 다른 동시다발적 공사 중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면서 김현옥 시장은 경질된다.[* 당시는 지방자치제도가 폐지되어 있던 시기라 모든 행정조직의 장은 정부각료였다. 광역단체장 → 정부각료, 기초단체장(시·군) → 광역단체 공무원으로 되어 있었다. 이 흔적은 광역자치단체의 부시장·부도지사 1인이 정부에서 내려 보내는 국가직 공무원으로, 기초자치단체의 부시장(단 100만 도시의 경우 부시장 2인 중 1인)·부군수·부구청장이 광역단체에서 내려 보내는 지방직 공무원으로 임명되는 것에서 남아 있다. 1988년 이전에는 광역자치단체인 시에 속한 구(區)는 자치단체가 아니었고 특별시·직할시에 속한 구든 도(道)소속 시에 속한 구든 모두 일반구였다.] 또한 동여의도에는 법원과 검찰청 등 법조단지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웃기게도 해당 부처와 협의도 안되어 있었는데 뭔 깡인지 김현옥은 그냥 밀어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때 이전에 실패한 대법원, 대검찰청, 서울고법, 서울고검 등을 비롯한 사법관련 기관들은 한참 후인 1980년대 말~90년대 초가 되어서야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 부지가 시범아파트로 팔리며 김수근 사단의 여의도 개발 계획은 좌초되었다. 김현옥의 후임인 [[양택식]] 시장은 [[김수근]] 건축가의 입체도시 계획을 갈아엎고, 여의도를 평면계획으로 변경하여 일반인에게 분양하는 데 주력했다. 이어서 5.16광장[* 현재의 [[여의도공원]]]이 여의도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르고 들어오면서 여의도 입체도시 계획은 완전히 박살나게 된다.[* 당시 재정 사정으로 볼 때 입체도시를 실현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만약 실현되었으면 [[경인통합|종로-마포-여의도-영등포-부천-인천을 잇는 선형 도시계획 메갈로폴리스]]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도쿄계획 역시 선형계획이기 때문에, '도쿄계획 1960'의 모방이란 얘기가 나왔던 거다.] 이어서 양택식 시장은 서울시청 이전 계획과 함께 여의도 지역을 전국 유일의 '''[[야간통행금지]] 해제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추후 여의도 택지 사업 대금은 실제로 빈사 상태의 서울시 회계장부를 겨우 숨통 트이게 만들었으며, 이 중 10억원이 전용되어 개통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이다. 1971년 첫 입주가 이루어진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양택식 시장의 민자사업 중 첫 단추에 해당한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 서울시는 민간으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 입장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일거에 해소하려는 전시효과도 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도 입주하려 하지 않아서 공무원 등에게 반강제로 입주케 하기도 했으나 1974년 삼익주택, 한양건설을 비롯한 당시 잘 나가던 민간 시공사들도 진출하여 고층 아파트 단지[* 20평대 이하가 거의 없고 중대형 아파트들이 대부분이어서 중산층, 상류층 계층 주민이 입주한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몇몇 아파트의 설계를 보면 '''[[식모]]방'''이 있었다. 식모를 둘 정도의 부유층들이 많이 살았다는 얘기. 오늘날 초대형 주상복합 아파트 일부평형에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가정부 휴게실'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가 생겼으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 중앙 집중식 난방 등이 설치되었고 특히 여의도를 특별 학군으로 분류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소득 높은 고학력층들이 많이 이주했다.[* 이는 [[동부이촌동]], [[압구정동]], [[반포동|신반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4년 9월 2일에 취임한 [[구자춘]] 시장은 서울의 도시계획을 여의도가 아닌 강남으로 초점을 맞추어서 여의도 개발에는 힘이 실리지 않게 된다. 결국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여의도를 지나가지 않게 되면서 여의도는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구자춘 시장은 전임자인 김현옥의 작품인 여의도에 힘을 실어 줄 이유가 없었다.] 1975년 8월 15일, 1968년에 첫 삽을 뜬 [[대한민국 국회의사당|국회의사당]]이 준공되었다. 1976년 [[한국방송공사|KBS]] 신사옥이 준공되었다. 1979년 명동에 있던 [[한국증권거래소]]가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명동, 을지로 등지에 흩어졌던 많은 증권업체와 금융기관도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증권 중심지로 거듭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증권사들이 여의도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 증권사들의 탈여의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미래에셋증권]], [[유안타증권]], [[대신증권]]이 원조 증권가인 명동과 을지로로 이사를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