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의도 (문단 편집) === 구한말 이전 === 근대 이전에는 [[농사]]에 쓸모가 없던 별 볼 일 없는 모래섬이었다. 그렇지만 섬 서북쪽에 가축을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수풀이 우거진 나지막한 산[* 양말산, 현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 있었던 데다가 섬 지형 특성상 가축이 달아날 염려가 없어 방목하기 좋았기 때문에 동물을 키우는 목축지로 사용되었다. <영등포의 역사와 지명이야기>(민긍기)에서 조선왕조 이전의 여의도는 지금의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와 함께 [[시흥군|잉벌노 땅이었을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아쉽게도, 조선초기까지는 여의도를 어느 군현(고을)이 관할했는지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1421년 ([[세종대왕|세종]] 3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수연(水碾)과 잉화도(仍火島)에서 양·돼지·닭·오리·기러기 등을 나누어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왕조 초기부터 이곳에 국립목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30년 ([[진성대군|중종]] 25)년 편찬된 신증동국전지승람에는 '잉화도(仍火島)'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어 "서강(西江) 남쪽에 있고 축목장(畜牧場)이 있다. 사축서, 전생서의 관원 한사람씩을 보내어 목축을 감독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1556년 ([[경원대군|명종]] 11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잉화도에는 전생서와 사축서의 [[노비|관노비]]들이 거주하면서 이들이 근친 간 통혼을 일삼고 물을 건널 때에도 함부로 옷을 벗으며 남녀 간에 손을 잡고 다니는 바 습속이 음란하므로, 섬의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서울의 본청[* 현재 [[용산구]] [[해방촌]] 일대에 위치.]으로 옮기도록 하고, 가축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만 하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 촌락이 형성되었는지 1751년 ([[영조]] 27년) '도성3군문분계총록'[* 도성 방어를 위해 발간한 책자로, 도성 및 성저십리 구역을 '계(契)'라는 단위로 분할하여 방어책임을 명시하였다.]에서는 [[성저십리|한성부 서부 연희방 내에 여의도계(契)라는 구역이 등장한다]]. 여의도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고종황제|고종]] 대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에서 "나의주(여의도)는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사축서와 전성서의 관원을 보냈으나 이를 폐지하였다. 지금(고종 시절)은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0마리 만을 놓아기른다"고 기술되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